김성근 감독님 강연
2011년 10월 4일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 대강당
안녕하십니까 김성근입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이 11번째 짤렸다고들 합니다. 저는 몰랐는데 주변사람들이 말해줘서 알았습니다. 그래도 있는 동안 후회 없이 전력투구하고 와서 미련은 남지 않는 것 같아요. 현장에 있을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싸웠어요. 그건 리더로서의 팀을 이끌어야한다는 사명감 때문인 것 같아요.
살아남기 위해 일하거나 일하기 위해 살아남는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일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 그런 사람들은 아주 불쌍한 것 같다. 일이라는 것은 자신의 신념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나중에 후회가 막심하다.
그래서 그 반대로 살아온 나는 SK에 큰 미련이 없다. 최선을 다하고 난 뒤의 일이라 큰 후회는 남지않는다. 다만 그렇게 힘겹게 싸워온 뒤의 휴식이라 목표가 없어져서 허무한 감이 없잔아 있다.
인간이란 불안정할 때, 구석에 몰렸을 때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나는 무슨 일이 있을 경우 주변 상황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론이나 구단이나 누가 떠들건 신경쓰지 않았다. 세상에 맞춰서 사는 건 아니라고 본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이 있으면 남과 타협하거나 기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오직 나만이 중요하다. 나는 변명이나 남 탓 하는 사람은 굉장히 싫어한다.
야구판에 핀치는 곧 찬스라는 말이 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다. 5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SK에 있으면서 어려울 때나 고민이 있을 때는 숙소에서 인천구장까지 두 시간이 넘는 기간을 자주 걸어갔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더 걸었다. 매번 걸을 때마다 생각하던 것은 김성근이 니가 문제다라는 것이다. 가끔 이호준이 이놈 왜 그렇게 못치지 하는 등의 생각도 했는데(좌중 웃음) 결국은 내가 잘 못해서 그런 것 이었다.
저번에 한번은 결심을 하고 머리를 박박 밀었는데, 어찌어찌 팀이 좀 안정이 되나 했는데 결국은 짤렸어요(좌중 웃음) 아마 머리 깎고 잘린 감독 나밖에 없지 않나 시포요
내가 태평양에 있을 때 오대산에 한번 간 일이 있어요. 지금 가라면 못갈 것 같은데, 그때는 팀의 구심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갔어요. 그때 5명씩 팀을 짜서 팀웍을 키우게하려고 팀을 짜서 굴렸어요. 눈밭에 굴렸어요 맨몸으로. 애들이 사과랑 땅콩같은 것들을 몇 개 가져가서 먹게했는데, 그때 사과는 못먹었다고 하더라고 얼어서. 나는 안 가봐서 몰라요.(웃음). 아무튼 다음날 보니까 살아서 왔더라고.
나는 프로 말고 학생들 가르칠 때도 그런 훈련을 많이 시켰어요. 극기훈련 같이 생과 사를 가로지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충암고도 태평양처럼 전국에서 온 학생들이 있던 팀이었는데 그 부임한 해에 우승했어요. 태평양도 62승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태평양에 있을 때 1승도 못했던 투수가 셋 있었는데, 엄청 훈련시켰고 다음해 그 세 명이 40승을 했어요. 그 훈련을 시킬때는 공을 던지게 하는데 포수 미트에 가져간 대로 공이 안들어오면 카운트를 안했어요. 그렇게 훈련을 시킨 뒤에 사람이 달라지더라고. 사람이란 극한의 상황에서 그것을 극복해야 바뀐다고 생각해요. 그때 그 투수들도 그렇게 고생한 뒤에 많은 발전이 있었어요.
쌍방울 갔을 때는 박성기라는 선발투수가 있었는데, 승률이 3할2푼이었어요. 이건 투수가 아니에요. 아마 내가 나가도 그것보단 잘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생긴 게 벌떼야구에요. 이젠 다른 사람들은 다 알더라고. 대만을 갔는데도 대만사람들이 나한테 벌떼야구가 뭐냐고 했는데 나도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때 그래서 한 경기에 투수를 다섯명이고 몇 명이고 내서 이겼어요. 그쯤에 김현욱이라는 투수가 20승을 했는데 그건 엄청난건데 야구 모르는 사람들이 MVP를 안줬어요.
난 쌍방울에서 감독으로 제일 많이 성장했다고 봐요. 이건 뭐가 있는게 있어야지. 그래서 없는 상황이라 더 많이 성장할 수 있었어요. 투수교체 타이밍. 이것도 투수가 워낙 없다보니 그 때 보는 눈이 생겼어요. 타자의 노림수라거나 교체타이밍이라는 걸 그때 좀 알겠더라구요.
그때 박경완이도 나한테 욕 많이 먹었어요. 요즘은 티비에 나와서 안돼요(웃음).
그리고 내가 LG에 갔을 때는 개인만 있고 팀이 없었어요. 양준혁이랑 이병규도 있었어요. 양준혁이도 한번은 대구 경기 끝나고 한번 엄청 욕먹었고, 이병규도 수비 때문에 엄청 욕먹었어요. 김재현이도 그랬고. 그래도 그 셋이 정말 착한 선수들이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SK는 심하게 말해서 인사하는 법도 몰랐어요. 그래서 그것부터 가르쳤고. 2003년에 SK가 준우승을 한번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구단에서 초청해서 부장이랑 감독들도 있는자리에서 말을 한번 해달라고 해서 간적이 있었어요. 나는 또 말하라고 하면 가려서 말하는게 없어요. 말을 계속 하다보니까 감독이랑 부장이 나가더라고. 한국시리즈에서 왜 졌냐고 하는 말을 하는데 그때는 SK는 준우승에 만족하더라고. 그러면 안되는건데.
조동화 박재상 김강민도 참 못하는 애들이었는데, 김강민도 어깨 하나 좋아서 외야수 시켰어요. 그래도 그 애들이 지금 팀의 주축이니까 육성이라는게 참 대단한거에요. 정근우만 해도 쪼그만해서 캐치볼도 잘 못하던 애였는데. 뭐 지금도 캐치볼은 못해요. 이진영이 그때 1루수였는데 정근우가 원바운드로 송구했는데 아차싶었는데 이진영이 잡았어요. 내가 덕아웃에서 잘 안일어나는데 그때는 뛰쳐나와서 웃었어요.
젊은 사람들은 한계를 높게 잡아야해요. 07년에 초반에는 젊은 선수들이 많이 딸렸는데 후반갈수록 올라왔어요. 박재상이도 많이컸고. 07년이 SK야구의 시작이 아닌가 싶어요
어떤 역경속에 처해도 굴복하지마라. 사람은 다 극복할 수 있다. 언젠가 한번은 캠프를 갔는데 혼자 밥을 먹고있었다. 옆테이블에 보니까 중년 부부가 와있더라. 근데 부인이 모자를 쓰고있었다. 근데 SK관계자냐고 물었는데 그렇다고 하니까 어제 자기 애가 SK선수한테 사인볼 받았다고 고맙다면서 얘기가 시작됐는데 그날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고 하더라. 암에 걸렸는데 그분이 원래 교단에 스셨던 분이었단다.
며칠 뒤에 캠프지를 떠나는 날 새벽에 4시에 일어나서 그분한테 편지를 썼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대로 살수 있다는 내용의 장문의 편지였다. 근데 가을에 가보니 그분이 다시 교단에 서 있더라. 사람은 절실하면 그런 결과가 오지 않나 싶더라. 그분이 교단에 선 뒤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 없더라.
내가 쌍방울 있을 때 오키나와 캠프에 갔는데, 역시 캠프를 온 LG를 보러갔다. 그때 엘지 1군은 사이판으로 갔고, 2군은 오키나와에 와있었다. 그때 관계자가 나에게 한명도 손실없이 1군에 올라갈 수 있겠다 라고 했다. 그때 나는 요시 LG는 잡았다라고 확신했다. 이 팀은 무슨생각을 가지고 야구를 하고 있냐고 생각했다. 안전빵으로 보통만 하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것은 근무태만이다. 그것이 LG였다.
부모의 생각 하나가 자식을 키우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나는 할아버지 스타일의 감독을 제일 싫어한다. 오냐오냐하는 것은 선수를 망친다. SK왔던 박진만이. 게을러요. 표정그대로다. 뒹굴뒹굴해요. 박진만을 망가뜨린 것은 현대 삼성시절의 지도자들이 아닌가 싶다. 선수가 더 발전할 수 있는데 그 한계를 정해버렸던 것 같다. 근데 또 올해 경기하는데 하필이면 삼성경기에요. 그날 한경기에 두 개나 실책해서 결국 역전패했어요. 그래서 그날 끝난 뒤에 열이 받아서 500개 펑고를 했는데 일부러 못잡을 코스로 좌우 폭 넓게 해서 쳤어요. 나중엔 네발로 기더라고. 근데 그 뒤로 박진만이가 좀 살아났어요.
또 한번은 원정경기에서 정근우가 번트를 실패했는데, 그날 코치한명 붙여서 바로 문학구장으로 보냈다. 번트를 천개를 시켰는데 한밤중이 돼서 리베라호텔로 돌아오더라. 근데 그 뒤로는 번트를 잘 대더라.
사람들은 쉽게 만족을 하고 산다. 나는 이겨도 무표정하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긴 경기라도 더 완벽하게 이길 수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항상 선수를 내 뒤에 숨겼다. 그래서 구단과 마찰이 심했다. 내가 편하게 구단과 손잡고 선수와 코치를 내 앞에 놔뒀으면 굉장히 편했을거다. 근데 나는 그렇게 하지않았다. 내 생각에 내 뒤에서 있던 선수들은 굉장히 편했지않나 싶다.
야구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아야한다. 머리로 알 수 있을 때까지가 아니라 몸이 따라갈 때 까지 해야 한다.
올해 초에 삼성병원에서 수술할 때 이승엽이가 병문안 왔을 때도 한시간반동안 뭐라고 한적이 있다. 요즘은 좀 나아졌는데, 사람은 변명이 있으면 안된다. 일단 벽이 있으면 부딪히고 봐야한다.
감독들의 코멘트를 보면 그 팀이 어떻게 되겠다 알아요. 시즌초에야 뭐 그렇다 쳐도, 시즌 중후반으로 갈수록 성적부진을 선수탓으로 돌리는 감독이 있는데 그 팀은 망한거에요.
SK할때는 내가 공공의 적이었어요. 내가 무슨 공산당도 아니고 말이지.
여기서 여러분에게 내가 말해드리고 싶은 것은 포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경기를 지고있더라도 포기를 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 반드시 역전의 기회가 온다.
LG에 있을 때 기아에 3점차 리드당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포기를 하지않고 있었다. 근데 그때 조인성이 실책해서 4점차로 벌어졌다. 3점차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역전할 수 있었는데 4점차는 3점차랑 다르다. 그래서 그때 조인성이 들어왔을 때 덕아웃 뒤로가서 복싱연습좀 했어요.(좌중웃음) 그놈이 원래 남 탓하는 버릇도 좀 있어요. 2군도 세 번정도 보냈는데 그리고 나니까 더 보낼데가 없어요, 무슨 감옥을 보낼수도 없고.(웃음) 아무튼 조인성이도 요즘보면 좀 나아졌어요.
야구에서도 확인사살이라는게 있는데 나는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전에도 7대영에서 8대7로 역전당하는 경기를 봤다. 나는 7회건 8회건 9회건 리드하고 있을 때도 투수교체를 한다. 얼마든지 역전이 될 수 있는 게 야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 신경쓰지않고 사는데도, 사람들이 매번 그러니까 나도 한번은 흔들린 적이 있었다. 5점 리드하고 있을 때 그래서 확인사살을 안하고 그대로 갔는데 그 경기가 뒤집어졌다. 그 경기가 끝난 뒤에 굉장히 자책을 많이 했다. 그렇게 한번 지는 건 한 경기 패배한 게 아니라 흐름이 바뀌는 거에요. 연승이 끊어질 수도 있고 연패가 길어질 수도 있는 거에요. 그래서 야구는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가야하는 거에요. 그래서 승부라고 하는 것은 이기고 있건 지고 있건 베스트로 가야해요.
우리집에 고양이가 네 마리있어요. 근데 키우는 고양이가 아니라 다 고양이에요. 그냥 사료주면 고양이들이 와서 먹고 또 자기도 하고 그래요. 이건 고양이 민박집이에요(웃음). 근데 요즘은 비둘기도 와서 사료를 노려요. 비둘기가 위에 앉아서 노리고 있으면 고양이는 또 그걸 못오게 경계해요. 그런걸 보면서 동물들도 절실하게 사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한테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은건, 요즘은 젊은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가늘고 길게 살려고하는 생각은 버려야한다고 생각해요. 안전빵으로 보통으로 하려고하면 상식적인 결과밖에 못 얻어요. 비정상적으로 비상식적으로 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예전에 캠프에서 SK선수들끼리 홍백전을 하는데 애들이 장난이 아닌거에요. 홈쇄도 할때도 와서 쾅 부딪히고. 팀끼리 하는 홍백전인데 그러는건 비정상적인거지. 지켜보는 나도 걱정을 했어요. 결국 그러다가 포수가 부상을 당했는데, 그때 부상당했어도 한국으로 안돌려 보냈어요. 그렇게 돌려보내면 다른 선수들이 그런 플레이를 안할거 같았거든. 아무튼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훈련해서 나온게 SK였어요.
나는 굵고 짧은 삶을 모토로 살았는데,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살면서 남 탓은 절대 하면 안돼요. 무언가 잘못되면 무조건 자신을 탓하세요. 그래야 길이 보이고 발전이 생겨요.
시간이 됐으니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은, 모든 일을 할 때에는 즐겁게 할 필요가 있지않나 싶어요. 즐겁지 않으면 즐겁게 만들어야 해요. 나는 야구장 가는 길이 제일 즐거워요. 여러분은 등교하는 길이 제일 즐거워야 해요. 그리고 나중에 회사를 가면 출근길이 제일 즐거워야해요.
그리고 일을 할 때 안된다 안된다 하는게 아니라, 안돼도 일단 하고 보는게 중요해요. 결과적으로 안되더라도 그 프로세스에서 얻는게 많아요. 나는 이제 60이지만 아직 젋다고 스스로 생각해요. 여러분 오늘 들어줘서 감사하고 열심히 사셨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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