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서서히 자라나는 정
낯 모르는 사람끼리 처음으로 만나서 무슨 정이 그렇게 샘물같이 솟아난다냐. 사람의 정이란 나무 키우는 것 한가지라. 그저 성심껏 물주고 보살피고 믿어 두면, 어느새 잎사귀도 나고, 꽃도 피고, 언제 그렇게 됐는가 싶게 열매도 여는 것이다.
- 최명희의 <혼불> 중에서 -
10/31/2011
Freedom is ... (Charles Peguy)
Freedom is a system based on courage.
- Charles Peguy
자유는 용기에 근거를 둔 제도이다.
- 샤를르 페기 (佛사상가·시인, 1873-1914)
- Charles Peguy
자유는 용기에 근거를 둔 제도이다.
- 샤를르 페기 (佛사상가·시인, 1873-1914)
10/30/2011
10/29/2011
10/28/2011
A woman means by unselfishness chiefly taking trouble for others; a man means not giving trouble to others. Thus each sex regards the other as basically selfish.
- C.S. Lewis (1898-1963)
이타적이라는 말을 할 때 여자는 주로 남을 대신해 고생하는 것을 뜻하며 남자는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각기 서로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라 생각한다.
- C.S. 루이스 (영국 작가, 1898-1963)
- C.S. Lewis (1898-1963)
이타적이라는 말을 할 때 여자는 주로 남을 대신해 고생하는 것을 뜻하며 남자는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각기 서로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라 생각한다.
- C.S. 루이스 (영국 작가, 1898-1963)
10/27/2011
관심
관심
늘 지켜보며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네가 울면 같이 울고
네가 웃으면 같이 웃고 싶었다
깊게 보는 눈으로
넓게 보는 눈으로
널 바라보고 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하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모든 것을 잃더라도
다 해주고 싶었다
- 용혜원의 시《관심》(전문)에서-
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입니다. 사랑은 작은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관심을 가지면 해 주고 싶은 것도 많아집니다. 더 깊이 관심을 가지다 보면 다 보입니다. 그 사람의 실핏줄까지도 보입니다.
늘 지켜보며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네가 울면 같이 울고
네가 웃으면 같이 웃고 싶었다
깊게 보는 눈으로
넓게 보는 눈으로
널 바라보고 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하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모든 것을 잃더라도
다 해주고 싶었다
- 용혜원의 시《관심》(전문)에서-
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입니다. 사랑은 작은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관심을 가지면 해 주고 싶은 것도 많아집니다. 더 깊이 관심을 가지다 보면 다 보입니다. 그 사람의 실핏줄까지도 보입니다.
10/26/2011
Progress (Franklin Delano Roosevelt)
The test of our progress is not whether we add more to the abundance of those who have much; it is whether we provide enough for those who have too little.
- Franklin Delano Roosevelt (the 32nd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1933-1945)
발전의 기준은 우리가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없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주는 데 있다.
-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1882-1945)
- Franklin Delano Roosevelt (the 32nd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1933-1945)
발전의 기준은 우리가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없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주는 데 있다.
-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1882-1945)
일상의 행복
일상의 행복
일상에서 행복할 수 있으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안정된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고, 먹을 양식이 있으면 행복한 일상이다. 나를 믿고 따르는 가족이 있고, 매일 몸을 녹일 수 있는 집이 있으면 행복한 일상이다. 여기다가 신앙까지 있다면 더욱 입체적인 행복감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이무석의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에서 –
나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눈 뜨고, 보고, 만지고, 느끼고, 걸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나를 높일 수 있는 자존감을 갖고 있느냐, 아니면 자신을 낮추는 열등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내 인생은 달라진다. 한번 주어진 인생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자!
일상에서 행복할 수 있으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안정된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고, 먹을 양식이 있으면 행복한 일상이다. 나를 믿고 따르는 가족이 있고, 매일 몸을 녹일 수 있는 집이 있으면 행복한 일상이다. 여기다가 신앙까지 있다면 더욱 입체적인 행복감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이무석의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에서 –
나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눈 뜨고, 보고, 만지고, 느끼고, 걸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나를 높일 수 있는 자존감을 갖고 있느냐, 아니면 자신을 낮추는 열등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내 인생은 달라진다. 한번 주어진 인생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자!
10/25/2011
10/24/2011
가족은 없어도 이웃은 있어야 산다 (이용복)
사실 가족은 없어도 이웃은 있어야 산다. 그것이 인간 사회라는 것의 현실이다. 의식주를 비릇한 모든 인생살이가 이웃이 있음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이웃은 고마운 존재다. 내게만 고마운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고마운 존재다.
이용복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중에서
요즘은 옆 집은 있어도 이웃이 없습니다. 이웃이 없는 오늘의 문화는 풍족해도 너무나 삭막하고 훈훈한 사랑과 정이 없어 마치 사막지대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옆 집만 아니라 온 동네가 우리의 이웃으로 온라인처럼 밤이나 낮이나 항상 대화와 정이 통하고 특히 애경사 때는 내일처럼 적극 돕고 도움 받았습니다.
이웃은 복! 이웃의 회복이 반드시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용복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중에서
요즘은 옆 집은 있어도 이웃이 없습니다. 이웃이 없는 오늘의 문화는 풍족해도 너무나 삭막하고 훈훈한 사랑과 정이 없어 마치 사막지대에 사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옆 집만 아니라 온 동네가 우리의 이웃으로 온라인처럼 밤이나 낮이나 항상 대화와 정이 통하고 특히 애경사 때는 내일처럼 적극 돕고 도움 받았습니다.
이웃은 복! 이웃의 회복이 반드시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된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된다. 언제나 사랑만받는 사람은 없다. 내가 네 뒤에 서있듯이 그 사람은 나의 등을 바라보고있는거겠지. 우리들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받은사랑을 다시 다른사람을사랑하는데 쓰는거겠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랑 사랑해주는 그 단순한공식을 맞히지 못해서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또상처를 주며 살아갈것이다. 사랑이 존재하는한, 돌고돌며 역할이 바뀌는 그 경주는 멈 추지않을것이다
[사랑하지만사랑하지않는다] 중에서.,,
지금 서로 사랑하나요? 혹시 사랑하지 않는데 그 사람과 연인이 되어 상처주지는 않는가요? 한쪽에서만 사랑하는 건 너무나 외롭고 슬프답니다. 지금 내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사랑하지만사랑하지않는다] 중에서.,,
지금 서로 사랑하나요? 혹시 사랑하지 않는데 그 사람과 연인이 되어 상처주지는 않는가요? 한쪽에서만 사랑하는 건 너무나 외롭고 슬프답니다. 지금 내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10/23/2011
10/22/2011
10/21/2011
10/20/2011
하늘을 가진 손 (반칠환)
하늘을 가진 손
보리 한 줌 움켜쥔 이는 쌀가마를 들 수 없고, 곳간을 지은 이는 곳간보다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 성자가 빈 손을 들고, 새들이 곳간을 짓지 않는 건 천하를 다 가지려 함이다. 설령 천하에 도둑이 든들 천하를 훔쳐다 숨길 곳간이 따로 있겠는가? 평생 움켜쥔 주먹 펴는 걸 보니 저이는 이제 늙어서 새로 젊어질 때가 되었구나.
- 반칠환의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중에서 -
세상에는 움켜쥐어서 얻는 것이 있고, 움켜쥠으로써 오히려 잃는 것이 있습니다. 얻은 것 같은데 잃고, 잃었는데 얻게 되는 신비한 이치가 존재합니다. 하늘을 가진 손은 움켜쥔 손이 아니라 활짝 펼쳐진 빈 손입니다
보리 한 줌 움켜쥔 이는 쌀가마를 들 수 없고, 곳간을 지은 이는 곳간보다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 성자가 빈 손을 들고, 새들이 곳간을 짓지 않는 건 천하를 다 가지려 함이다. 설령 천하에 도둑이 든들 천하를 훔쳐다 숨길 곳간이 따로 있겠는가? 평생 움켜쥔 주먹 펴는 걸 보니 저이는 이제 늙어서 새로 젊어질 때가 되었구나.
- 반칠환의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중에서 -
세상에는 움켜쥐어서 얻는 것이 있고, 움켜쥠으로써 오히려 잃는 것이 있습니다. 얻은 것 같은데 잃고, 잃었는데 얻게 되는 신비한 이치가 존재합니다. 하늘을 가진 손은 움켜쥔 손이 아니라 활짝 펼쳐진 빈 손입니다
만족 (전광의)
만족
자신의 삶에 만족한 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이웃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역시 행복한 일입니다. 행복은 자신의 삶속에서 발견하는 것이요 느끼는 것입니다. 성공해서 감사하고 행복한것이 아니라 먼저 감사해서 행복해 하면 성공은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와 행복 하나의 성공의 기술이라 말 할수 있습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해도 부자로 살 수 있고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많이 가졌어도 가난 합니다. 행복 하려거든 감사함에 눈 떠야 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사실에 감사하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에 감사하고 작은 일에도 보람을 찾으면 행복하고 감사한 인생이 되는것 입니다.
- 전광의 글 (작은 감사 큰 행복) 중에서
작은 집에서 살면서도 그안에서 가족과 행복한 삶을 살수 있고 가족과 한마음이 되어 사랑하며 이해하며 살수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은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오고 행복은 감사한 마음에서 나오게 됩니다. 올한해 가기전 부모님. 부부. 자녀 . 형제 .친구들 .아는 모든이들에게 감사 하다고 편지 보내드리고 문자 하고 전화 드린다면 한결 가까워 지고 좋은 관계 유지 되리라 확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행복이 있고 항상 웃음이 있어 기쁜 마음이 생깁니다. 올가을 에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한 삶을 살고 겨울을 기쁘게 맞이하세요
자신의 삶에 만족한 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이웃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역시 행복한 일입니다. 행복은 자신의 삶속에서 발견하는 것이요 느끼는 것입니다. 성공해서 감사하고 행복한것이 아니라 먼저 감사해서 행복해 하면 성공은 저절로 따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와 행복 하나의 성공의 기술이라 말 할수 있습니다. 감사를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해도 부자로 살 수 있고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많이 가졌어도 가난 합니다. 행복 하려거든 감사함에 눈 떠야 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사실에 감사하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에 감사하고 작은 일에도 보람을 찾으면 행복하고 감사한 인생이 되는것 입니다.
- 전광의 글 (작은 감사 큰 행복) 중에서
작은 집에서 살면서도 그안에서 가족과 행복한 삶을 살수 있고 가족과 한마음이 되어 사랑하며 이해하며 살수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은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오고 행복은 감사한 마음에서 나오게 됩니다. 올한해 가기전 부모님. 부부. 자녀 . 형제 .친구들 .아는 모든이들에게 감사 하다고 편지 보내드리고 문자 하고 전화 드린다면 한결 가까워 지고 좋은 관계 유지 되리라 확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행복이 있고 항상 웃음이 있어 기쁜 마음이 생깁니다. 올가을 에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한 삶을 살고 겨울을 기쁘게 맞이하세요
10/19/2011
꽃잠 (양숙)
꽃잠
그저 그냥
화끈화끈 콩닥콩닥
어찌할까 어찌하나
달아오르는 얼굴 감추려
후후 날숨 얼굴 식혀보지만
귓불 붉어짐 숨길 수 없고
뛰는 가슴 진정시키려
양손 가슴 꾹 눌러보지만
손등까지 덩달아 뛰어오르네
- 양숙의 시집《하늘에 썼어요》에 실린 시 <꽃잠>에서 -
꽃잠. 신랑 신부가 첫날밤에 자는 잠을 뜻합니다. 하늘과 땅, 낮과 달, 음과 양, 남극과 북극이 만나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가슴 뛰는 시간입니다. 그런 꽃잠은 신혼 첫날밤만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신혼 첫날처럼 사랑하면 매일 밤이 꽃잠입니다
그저 그냥
화끈화끈 콩닥콩닥
어찌할까 어찌하나
달아오르는 얼굴 감추려
후후 날숨 얼굴 식혀보지만
귓불 붉어짐 숨길 수 없고
뛰는 가슴 진정시키려
양손 가슴 꾹 눌러보지만
손등까지 덩달아 뛰어오르네
- 양숙의 시집《하늘에 썼어요》에 실린 시 <꽃잠>에서 -
꽃잠. 신랑 신부가 첫날밤에 자는 잠을 뜻합니다. 하늘과 땅, 낮과 달, 음과 양, 남극과 북극이 만나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가슴 뛰는 시간입니다. 그런 꽃잠은 신혼 첫날밤만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신혼 첫날처럼 사랑하면 매일 밤이 꽃잠입니다
Happiness (Bertrand Russell)
Anything you're good at contributes to happiness.
- Bertrand Russell (1872-1970)
당신이 잘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행복에 도움이 된다.
- 버트랜드 러셀 (英 철학자, 1872-1970)
- Bertrand Russell (1872-1970)
당신이 잘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행복에 도움이 된다.
- 버트랜드 러셀 (英 철학자, 1872-1970)
10/18/2011
곤란한 문제에 직면할 땐 백지가 되라. 무(無)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길은 열릴 것이다.
- 大望 -
- 大望 -
10/17/2011
무엇인가를 하라
무엇인가를 하라
무엇을 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다. 무언가를 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 제프리 J 폭스의 <마케팅 슈퍼스타> 중에서 -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린다면 언제 감을 내 손에 쥘 지 모릅니다. 내 맘속에 주저함이 숨어있을 때, 차라리 행동을 한다면 더 시원함을 느낍니다. '아무도 하지 않으면 내가 한다'는 말도 있듯, 행동을 통해서 성취하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다. 무언가를 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 제프리 J 폭스의 <마케팅 슈퍼스타> 중에서 -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린다면 언제 감을 내 손에 쥘 지 모릅니다. 내 맘속에 주저함이 숨어있을 때, 차라리 행동을 한다면 더 시원함을 느낍니다. '아무도 하지 않으면 내가 한다'는 말도 있듯, 행동을 통해서 성취하기 바랍니다.
10/15/2011
When she finally stopped conforming to the conventional picture of femininity she finally began to enjoy being a woman.
- Betty Friedan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대로 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여자임을 즐겁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 베티 프리단 (여권운동가이자 작가)
- Betty Friedan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대로 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여자임을 즐겁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 베티 프리단 (여권운동가이자 작가)
10/14/2011
타인의 결점 (르나)
타인의 결점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 르나 -
- 르나 -
마음 속 그림 (콜로드 브리스톨)
마음 속 그림
마음속에 어떤 성공의 그림을 갖지 못한다면 이루어 지는 것이 거의 없다. 대예술가, 문필가, 발명가 같이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들은 자기의 뜻대로 영상을 만들고 마음의 그림을 그리는 기술을 가졌다. 어떤 사람이라도 물질이든 사건이든 자기가 현실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온갖 일들을 마음의 눈에 그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콜로드 브리스톨의 《신념의 마력》중에서 -
마음의 그림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은 실천입니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마음의 그림도 빛을 내지 못합니다. 마음 속 그림은 종이 위의 그림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성장과 함께 수시로 고치고 보완하면서 조금씩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어떤 성공의 그림을 갖지 못한다면 이루어 지는 것이 거의 없다. 대예술가, 문필가, 발명가 같이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들은 자기의 뜻대로 영상을 만들고 마음의 그림을 그리는 기술을 가졌다. 어떤 사람이라도 물질이든 사건이든 자기가 현실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온갖 일들을 마음의 눈에 그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콜로드 브리스톨의 《신념의 마력》중에서 -
마음의 그림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은 실천입니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마음의 그림도 빛을 내지 못합니다. 마음 속 그림은 종이 위의 그림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성장과 함께 수시로 고치고 보완하면서 조금씩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10/13/2011
피해망상
세상엔 피해망상이란 벌레가 살고 있소. 이 벌레가 물기만 하면 딴 사람은 모두 적으로만 보이지.
- 大望 -
- 大望 -
추억의 우물
추억의 우물
우리들의 가슴 속에는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말갛고 고요한 추억을 긷는 우물입니다. 첫눈을 보아도 파도를 보아도 달을 보아도 가슴저린 것, 추억이란 이렇듯 소슬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사진첩입니다. 추억은 지난날의 슬픔조차도, 울먹이며 가슴 조이던 불행조차도, 감미로운 향수 속으로 몰아넣어 주는 포도주와 같다고도 하겠습니다.
- 문정희의《우리를 홀로 있게 하는 것들》중에서 -
추억을 떠올릴 땐 누구나 돌아보게 됩니다. 돌아보면, 그때는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일이 이제는 행복으로, 애틋함으로 다시 다가옵니다. 추억의 우물에 고인 어제의 슬픔, 아픔, 불행도 오늘 다시 길어올려 들여다보면 어느덧 말갛고 감미로운 포도주 빛깔로 바뀌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슴 속에는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말갛고 고요한 추억을 긷는 우물입니다. 첫눈을 보아도 파도를 보아도 달을 보아도 가슴저린 것, 추억이란 이렇듯 소슬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사진첩입니다. 추억은 지난날의 슬픔조차도, 울먹이며 가슴 조이던 불행조차도, 감미로운 향수 속으로 몰아넣어 주는 포도주와 같다고도 하겠습니다.
- 문정희의《우리를 홀로 있게 하는 것들》중에서 -
추억을 떠올릴 땐 누구나 돌아보게 됩니다. 돌아보면, 그때는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일이 이제는 행복으로, 애틋함으로 다시 다가옵니다. 추억의 우물에 고인 어제의 슬픔, 아픔, 불행도 오늘 다시 길어올려 들여다보면 어느덧 말갛고 감미로운 포도주 빛깔로 바뀌어 있습니다
First Love
The magic of first love is our ignorance that it can ever end.
- Benjamin Disraeli (1804-81)
첫사랑이 신비로운 것은 우리가 그것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 벤자민 디즈렐리 (영국 정치인/작가, 1804-81)
- Benjamin Disraeli (1804-81)
첫사랑이 신비로운 것은 우리가 그것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 벤자민 디즈렐리 (영국 정치인/작가, 1804-81)
10/12/2011
아! 저렇게 노랄 수가.
아! 저렇게 노랄 수가.
노란 은행나무가 서 있다. 정말 잎이 저렇게 노랄 수가 있는 것인가. 가을이 깊어갈수록 무당벌레들이 방황하는 것이 눈에 역력하다. 판자 울타리 위를 기어다니기도 하고 고추 말리는 마당을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 모두 갈 곳이 없는 것이다. 발에 밟혀 죽은 무당벌레들만 해도 한두 마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계속 날아든다.
- 최승호의《달맞이꽃 명상》중에서 -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코끝에, 눈가에, 옷깃 속에 가을 바람 가을 풍경이 파고듭니다. 거리엔 노란 은행잎이, 들녘엔 황금 물결이, 산야엔 붉은 단풍이 짙어갑니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주렁주렁 매달린 감도 따고 영근 곡식도 잘 거두십시오. 그러나 다음 채비도 잘 해야 합니다. 곧 추운 겨울이 올테니까요.
노란 은행나무가 서 있다. 정말 잎이 저렇게 노랄 수가 있는 것인가. 가을이 깊어갈수록 무당벌레들이 방황하는 것이 눈에 역력하다. 판자 울타리 위를 기어다니기도 하고 고추 말리는 마당을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 모두 갈 곳이 없는 것이다. 발에 밟혀 죽은 무당벌레들만 해도 한두 마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계속 날아든다.
- 최승호의《달맞이꽃 명상》중에서 -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코끝에, 눈가에, 옷깃 속에 가을 바람 가을 풍경이 파고듭니다. 거리엔 노란 은행잎이, 들녘엔 황금 물결이, 산야엔 붉은 단풍이 짙어갑니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주렁주렁 매달린 감도 따고 영근 곡식도 잘 거두십시오. 그러나 다음 채비도 잘 해야 합니다. 곧 추운 겨울이 올테니까요.
상대의 주장이 옳을수록 노여움이 더 끓어올랐다. 옳다는 것은 때로는 사람을 조금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 大望 -
- 大望 -
10/11/2011
10/10/2011
긍정성과 새로움 (김주환)
긍정성과 새로움
긍정적 정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진취성과 도전성도 키워준다. 예컨대 부정적인 정서가 많은 사람은 늘 하던 일만 하고, 먹던 것을 먹으려는 반면, 긍정적인 정서가 많은 사람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 김주환의 ‘회복탄력성’에서 –
습관적으로 모든 것을 하면은 새로움이 나올 수가 없다. 출근을 할 때도 가던 길만 가지 말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거나 식사를 할 때도 먹었던 음식만 선택하지 말고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등 항상 두뇌에 자극을 주는 가운데 창의력도 나오게 된다. 쉽지는 않겠지만 하나씩 행동으로 연결해보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긍정적 정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진취성과 도전성도 키워준다. 예컨대 부정적인 정서가 많은 사람은 늘 하던 일만 하고, 먹던 것을 먹으려는 반면, 긍정적인 정서가 많은 사람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 김주환의 ‘회복탄력성’에서 –
습관적으로 모든 것을 하면은 새로움이 나올 수가 없다. 출근을 할 때도 가던 길만 가지 말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거나 식사를 할 때도 먹었던 음식만 선택하지 말고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등 항상 두뇌에 자극을 주는 가운데 창의력도 나오게 된다. 쉽지는 않겠지만 하나씩 행동으로 연결해보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10/07/2011
거울처럼 살아라
거울처럼 살아라
남을 욕하고 싶을 때는 그가 당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자는 아름다운 것들과 결합하고 추악한 마음을 가진 자는 추악 한 것들과 결합하게 되며 사랑이 가득한 마음을 가진 자는 사랑이 가득한 것들과 결합하고 미움이 가득한 마음을 가진 자는 미움이 가득한 것들과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 이외수의 ‘코끼리에게 날개 달아주기’에서 –
거울 속에 비치는 나는 어떤 모습이나요? 거울 하나 준비해서 좋은 일, 나쁜 일, 기쁜 일, 슬픈 일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한번 보자! 넓고 깊은 마음으로 바다처럼 받아들이면 언젠가는 내 마음속에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이 넘쳐 날 것이다.
남을 욕하고 싶을 때는 그가 당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자는 아름다운 것들과 결합하고 추악한 마음을 가진 자는 추악 한 것들과 결합하게 되며 사랑이 가득한 마음을 가진 자는 사랑이 가득한 것들과 결합하고 미움이 가득한 마음을 가진 자는 미움이 가득한 것들과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 이외수의 ‘코끼리에게 날개 달아주기’에서 –
거울 속에 비치는 나는 어떤 모습이나요? 거울 하나 준비해서 좋은 일, 나쁜 일, 기쁜 일, 슬픈 일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한번 보자! 넓고 깊은 마음으로 바다처럼 받아들이면 언젠가는 내 마음속에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이 넘쳐 날 것이다.
인간은 제 아무리 큰 소리를 치다가도 한 껍질만 벗기면 모두 불쌍한 면을 가지고 있다.
- 大望 -
- 大望 -
10/06/2011
주코티 공원의 반란 (김경한)
주코티 공원의 반란
중학교 때부터 12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고 동부지역 명문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그는 다시 한국의 의학 전문대학원 진학을 위해 귀국했다. 100장이 넘는 이력서를 들고 2년 동안 무던히 취업문을 두드렸으나 헛수고로 끝났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부모들이 무리해서 유학지원을 해온 그 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니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미국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었던 과거는 이미 지나간 추억이다.
뉴욕 월가의 한복판 주코티 공원에 700여명의 청년 시위대가 모였다. 그들은 자유광장(Liberty Square)라고 부르는 이곳에서 거대 금융기관의 부정부패와 탐욕을 비판하는 시위를 3주째 계속하고 있다. “일자리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몇 날 며칠이고 이곳에서 투쟁할 생각”이라니 상황이 쉽게 끝날 것 같지는 같다. 지난주에는 로스엔젤레스와 시카고까지 시위가 번지고 금융사를 점령하라는 SNS 문자가 긴급히 확산되었다. 700여명이 현장에서 연행됐지만 순식간에 800여명의 청년시위대가 다시 집결했다.
정보기술이 청년들의 분노를 세계화시키고 있다. 영국과 독일, 이스라엘, 스웨덴, 그리스 등에서 비슷한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1960년 베트남 반전시위 이후 50년 만에 젊은이들이 거칠게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세상이 바뀌고 사회가 변혁되어야 한다는 요구다. 양극화와 탈선자본주의가 성난 지구촌 청년들을 ‘글로벌 앵거(Global Anger)’ 로 묶어내는 분위기다. 이대로 확산되면 가까운 시간 안에 전 세계의 실업청년들이 그들의 주장을 들고 거리로 나올 분위기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홈페이지 ‘뉴욕점령 선언서’의 문구를 보면 이들의 분노가 잘 나타나 있다. 3년 전 금융위기 때 미국정부는 대형금융사의 부도를 막기 위해 무려 835조원의 구제금융을 쏟아 부었다. 그런데 1년 후 골드만 삭스와 JP모건 등은 천문학적인 보너스 잔치를 벌였다. 2009년 골드만 삭스가 지급한 보너스 167억 달러는 뉴저지, 뉴욕, 애리조나, 일리노이, 매사추세츠 등 5개 주의 그 해 재정적자와 맞먹는다. 자신의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큰돈을 버는 것은 이해하지만 세금으로 잔치를 벌이는 행태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상위1%에게만 온갖 혜택이 주어지고 나머지 99%는 소외 당하는 현실이다.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의 현대자본주의 시스템이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는 인식이다. 미국의 상위 1% 소득계층이 재산을 탐욕적으로 불리는 사이에 청년층의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졌다고 절규한다. 이렇게 모순이 많고 불평등한 양극화가 진행되는 것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것이 주코티 청년들의 주장이다. 자신들의 꿈이 펼쳐지기도 전에 실업자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현실을 수용하기 힘들 것이다.
금융자본주의 성공신화의 주인공인 조지 소로스도 청년들의 주장에 동조했다. “월가의 시위대를 이해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수많은 영세사업자가 신용카드에 의존해 장사를 꾸려나가고 있는데 2008년 위기이후 카드 이자율이 8%에서 28%로 뛰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 영세사업자가 문을 닫았다” 고 지적하고 정치적 대안제시를 촉구했다. 프랑스 로레알의 릴리안 베탕쿠르나 미국의 워렌 버핏은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세금을 더 거둬서 일자리를 만들고 현재의 위기를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현가능성은 글쎄다.
한국도 미국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희망을 잃은 중산층이 하위계층으로 빠르게 전락 중이다. 중소기업들은 곤두박질 치는 주가에 짓밟히고 환율에 멍드는 잔인한 계절을 맞고 있다. 서민들은 900조원의 가계 빚에 눌려 괴로운 신음을 쏟아내지만 은행들은 사상최대의 순이익 잔치를 벌이고 있다. 수조원의 공적 자금이 들어간 저축은행은 주인들의 돈 잔치가 끝나고 서민들만 볼모로 잡혀있다. 승자가 전리품을 독식하는 시장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셈이다. 강자의 논리대로 끌려가는 자본주의가 정점에 달한 느낌이다.
경제개발 시대를 거쳐 온 장년층은 얘기한다. 2-30년 전에 비해 소득도 높아졌고 먹고 살만 해졌는데 왜 불만들이 이렇게 많으냐고. 물론 그때와 비교하면 절대소득은 크게 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훨씬 더 불안해하고 경쟁대열에서 혼자 뒤처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강자독식 사회로 달려온 결과물이 아닐까. 영화 도가니를 보면서 흥분하는 젊은 층은 우리사회의 강자들이 여유와 아량이 없다고 원망한다. 가진 사람이 참고 양보해야 하는데 그 반대라는 논리다. 약자들의 잘못은 크게 들춰지고 강자들의 잘못은 제대로 심판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런 모습들에 분노를 느낀다는 것이다.
무역입국의 깃발아래 수출이라면 열일을 제쳐놓고 재정으로 각종 특혜자금을 제공하고, 산업용 전기는 대폭 깎아서 싼값에 제품을 만들도록 도와주고, 시장에서는 그 제품을 국산품 애용이라는 명분아래 사주고, 저리융자금을 통해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키워줬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들은 경영권 편법승계를 연구하고 자녀들 앞으로 MRO 회사를 만들어 일감을 몰아주고 황제경영으로 정부나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잘살게 되면 실현되리라던 우리의 정의인가를 사람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사회운동가 오언 존스가 밝혔듯이 자본주의는 1920년대 출발 이후 지금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이데올로기로 박수를 받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찌 할 바를 모른다. 해결책도 없고 상황이 쉽게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치를 통해 본질을 바꿔야 하는지 부자들의 관용으로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지 처방은 안개 속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처럼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더는 존중되지 않을 것 같다. 무겁게 현실을 돌아봐야 해법이 나오지 않을까.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http://www.cstimes.com
중학교 때부터 12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고 동부지역 명문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그는 다시 한국의 의학 전문대학원 진학을 위해 귀국했다. 100장이 넘는 이력서를 들고 2년 동안 무던히 취업문을 두드렸으나 헛수고로 끝났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부모들이 무리해서 유학지원을 해온 그 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니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미국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었던 과거는 이미 지나간 추억이다.
뉴욕 월가의 한복판 주코티 공원에 700여명의 청년 시위대가 모였다. 그들은 자유광장(Liberty Square)라고 부르는 이곳에서 거대 금융기관의 부정부패와 탐욕을 비판하는 시위를 3주째 계속하고 있다. “일자리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몇 날 며칠이고 이곳에서 투쟁할 생각”이라니 상황이 쉽게 끝날 것 같지는 같다. 지난주에는 로스엔젤레스와 시카고까지 시위가 번지고 금융사를 점령하라는 SNS 문자가 긴급히 확산되었다. 700여명이 현장에서 연행됐지만 순식간에 800여명의 청년시위대가 다시 집결했다.
정보기술이 청년들의 분노를 세계화시키고 있다. 영국과 독일, 이스라엘, 스웨덴, 그리스 등에서 비슷한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1960년 베트남 반전시위 이후 50년 만에 젊은이들이 거칠게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세상이 바뀌고 사회가 변혁되어야 한다는 요구다. 양극화와 탈선자본주의가 성난 지구촌 청년들을 ‘글로벌 앵거(Global Anger)’ 로 묶어내는 분위기다. 이대로 확산되면 가까운 시간 안에 전 세계의 실업청년들이 그들의 주장을 들고 거리로 나올 분위기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홈페이지 ‘뉴욕점령 선언서’의 문구를 보면 이들의 분노가 잘 나타나 있다. 3년 전 금융위기 때 미국정부는 대형금융사의 부도를 막기 위해 무려 835조원의 구제금융을 쏟아 부었다. 그런데 1년 후 골드만 삭스와 JP모건 등은 천문학적인 보너스 잔치를 벌였다. 2009년 골드만 삭스가 지급한 보너스 167억 달러는 뉴저지, 뉴욕, 애리조나, 일리노이, 매사추세츠 등 5개 주의 그 해 재정적자와 맞먹는다. 자신의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큰돈을 버는 것은 이해하지만 세금으로 잔치를 벌이는 행태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상위1%에게만 온갖 혜택이 주어지고 나머지 99%는 소외 당하는 현실이다.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의 현대자본주의 시스템이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는 인식이다. 미국의 상위 1% 소득계층이 재산을 탐욕적으로 불리는 사이에 청년층의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졌다고 절규한다. 이렇게 모순이 많고 불평등한 양극화가 진행되는 것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것이 주코티 청년들의 주장이다. 자신들의 꿈이 펼쳐지기도 전에 실업자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현실을 수용하기 힘들 것이다.
금융자본주의 성공신화의 주인공인 조지 소로스도 청년들의 주장에 동조했다. “월가의 시위대를 이해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수많은 영세사업자가 신용카드에 의존해 장사를 꾸려나가고 있는데 2008년 위기이후 카드 이자율이 8%에서 28%로 뛰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 영세사업자가 문을 닫았다” 고 지적하고 정치적 대안제시를 촉구했다. 프랑스 로레알의 릴리안 베탕쿠르나 미국의 워렌 버핏은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세금을 더 거둬서 일자리를 만들고 현재의 위기를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현가능성은 글쎄다.
한국도 미국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희망을 잃은 중산층이 하위계층으로 빠르게 전락 중이다. 중소기업들은 곤두박질 치는 주가에 짓밟히고 환율에 멍드는 잔인한 계절을 맞고 있다. 서민들은 900조원의 가계 빚에 눌려 괴로운 신음을 쏟아내지만 은행들은 사상최대의 순이익 잔치를 벌이고 있다. 수조원의 공적 자금이 들어간 저축은행은 주인들의 돈 잔치가 끝나고 서민들만 볼모로 잡혀있다. 승자가 전리품을 독식하는 시장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셈이다. 강자의 논리대로 끌려가는 자본주의가 정점에 달한 느낌이다.
경제개발 시대를 거쳐 온 장년층은 얘기한다. 2-30년 전에 비해 소득도 높아졌고 먹고 살만 해졌는데 왜 불만들이 이렇게 많으냐고. 물론 그때와 비교하면 절대소득은 크게 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훨씬 더 불안해하고 경쟁대열에서 혼자 뒤처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강자독식 사회로 달려온 결과물이 아닐까. 영화 도가니를 보면서 흥분하는 젊은 층은 우리사회의 강자들이 여유와 아량이 없다고 원망한다. 가진 사람이 참고 양보해야 하는데 그 반대라는 논리다. 약자들의 잘못은 크게 들춰지고 강자들의 잘못은 제대로 심판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런 모습들에 분노를 느낀다는 것이다.
무역입국의 깃발아래 수출이라면 열일을 제쳐놓고 재정으로 각종 특혜자금을 제공하고, 산업용 전기는 대폭 깎아서 싼값에 제품을 만들도록 도와주고, 시장에서는 그 제품을 국산품 애용이라는 명분아래 사주고, 저리융자금을 통해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키워줬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들은 경영권 편법승계를 연구하고 자녀들 앞으로 MRO 회사를 만들어 일감을 몰아주고 황제경영으로 정부나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잘살게 되면 실현되리라던 우리의 정의인가를 사람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사회운동가 오언 존스가 밝혔듯이 자본주의는 1920년대 출발 이후 지금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이데올로기로 박수를 받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찌 할 바를 모른다. 해결책도 없고 상황이 쉽게 끝날 것 같지도 않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치를 통해 본질을 바꿔야 하는지 부자들의 관용으로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지 처방은 안개 속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처럼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더는 존중되지 않을 것 같다. 무겁게 현실을 돌아봐야 해법이 나오지 않을까.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http://www.cstimes.com
상처 (캐롤라인 미스)
상처
상처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피해자처럼 행동하거나 필요 이상의 기도와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피해를 입었다는 감정은 병을 덧나게 할 뿐이다.
- 캐롤라인 미스의 《영혼의 해부》중에서 -
상처는 눈물로 아물지 않습니다. 땅을 치고 통곡해도 상처는 그대로 남습니다.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은 시간뿐입니다. 상처의 순간은 아프고 쓰리지만 모든 걸 시간에 맡기고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나 꿋꿋이 걸어가십시오. 어느덧 상처는 불행의 흔적이 아니라 행복의 꽃으로 피어나게 될 겁니다
상처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피해자처럼 행동하거나 필요 이상의 기도와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피해를 입었다는 감정은 병을 덧나게 할 뿐이다.
- 캐롤라인 미스의 《영혼의 해부》중에서 -
상처는 눈물로 아물지 않습니다. 땅을 치고 통곡해도 상처는 그대로 남습니다.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은 시간뿐입니다. 상처의 순간은 아프고 쓰리지만 모든 걸 시간에 맡기고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나 꿋꿋이 걸어가십시오. 어느덧 상처는 불행의 흔적이 아니라 행복의 꽃으로 피어나게 될 겁니다
Steve Jobs Speech at Stanford Graduation
Steve Jobs Speech at Stanford Graduation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들 중 한 곳인 이 곳을 졸업하는 여러분과 오늘 함께 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이 번이 제게는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와 보는 것입니다. 오늘 전 여러분에게 제 인생의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 뿐 입니다. 대단한 게 아니죠. 단지 세 가지 이야기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첫번째 이야기는 점들이 연결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저는 리드 대학을 6개월 만에 그만뒀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대학을 그만 두기 전에 약 18개월 정도를 청강생으로 있었습니다. 제가 왜 대학을 그만두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이 모든 것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생모는 젊은, 결혼하지 않은 대학원생이었는데, 그녀는 저를 다른 가정에 입양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제가 대학을 졸업한 부모에게 입양되기를 매우 강력하게 희망했고, 그래서 제가 태어나면 한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죠. 하지만 제가 세상에 튀어나왔을 때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여자 아이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결정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대기자 명단에 있던 제 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전화로 '우리가 예상치 않았던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혹시 이 아이를 원하는가?'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 부모님은 '물론이죠!'라고 하셨다지요. 저의 생모는 나중에서야 제 어머니가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제 아버진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최종 입양 서류에 사인하길 거부하셨지요. 그녀는 제 부모님이 저를 나중에 대학에 보내겠노라고 약속한 몇 달 후에서야 비로소 마음을 누그러뜨리셨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그리고 17년 후 저는 정말 대학엘 갔습니다. 하지만 전 순진하게도 거의 스탠포드 대학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선택했고, 제 노동자계급의 부모님이 모은 저축 모두가 저의 학비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 전 대학에서 가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제가 그것을 펼쳐가는데 대학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저는 부모님들이 평생 일해서 모은 돈을 써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정했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믿기로 했지요. 그 당시 그것은 무척 겁나는 일이었지만 뒤 돌아 보면 그 결정은 제가 이제껏 제 인생에서 내린 결정들 중 가장 잘 한 것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대학을 그만두자 제가 흥미 없어 하던 필수 과목들을 들을 필요가 없어졌고 재미있어 보이는 과목들을 청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이 모든 것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전 기숙사 방도 없어서 친구들의방에 끼어 바닥에서 잤습니다. 그리고 콜라 병을 수집해서 병 당 5 센트씩 환불 받아 먹을 것을 마련했습니다. 일요일 저녁마다 마을을 가로질러 7마일(10킬로미터)을 걸어서 하리 크리슈나 사원에 가서 일주일에 한번 좋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전 이걸 정말 좋아했어요. 이렇게 제 호기심과 직관을 따름으로써 우연히 마주치게 된 많은 것들은 나중에 값을 매길 수 없을 큼 귀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리드 대학은 그 당시 아마도 미국에서 최고로 습자법을 잘 가르치는 곳이었습니다. 교내에 있는 모든 포스터나 모든 서랍의 색인은 아름답게 수작업으로 쓰여져 있었답니다. 전 대학을 그만 두었기 때문에 일반 과목들은 들을 필요가 없었지만 이 것을 어떻게 하는 건 지 배워보려고 습자법 수업을 듣기로 결정했지요. 저는 활자체에 장식선을 붙이는 방법, 서로 다른 글자들의 조합에서 간격을 조절하는 법, 그리고 무엇이 멋진 글자들을 정말로 멋지게 하는 지에 관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아주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으로 미묘해서 과학이 잡아낼 수 없는 방식의 것이었고 전 이게 아주 매혹적이란 것을 알게 되었지요.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이 중 그 어떤 것도 제 인생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리란 희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 년 후 우리가 최초의 맥킨토시 컴퓨터를 디자인하고 있었을 때, 그 모든 것이 제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맥 속에다 그 모든 것을 디자인해 넣었지요. 그것은 멋진 활자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죠. 만약 제가 대학에서 그 과목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맥은 다양한 서체도 결코 갖지 못했을 것이고 균형 있게 이루어진 폰트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는 맥의 복사품이니 컴퓨터에서 이런 것들이 없었을 수도 있겠죠. 제가 대학을 중퇴하지 않았다면 전 습자법을 청강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컴퓨터에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멋진 글자체도 없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대학시절에 점들을 미래로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 전을 되돌아 보면 이건 매우 분명합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다시 말씀드리지만 점을 미래로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과거로 연결할 수 있을 뿐이죠. 그래서 여러분은 믿어야 합니다. 점들은 미래로 어떻게든 연결 된다는 것을 말이죠.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믿어야 합니다. 당신들의 심지, 운명, 인생, 전생 그 무엇이든지요. 이런 접근법을 이용해서 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었죠.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제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패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전 운이 좋았답니다.- 인생 초반기에 제가 사랑하는 일을 찾았으니까요. 워즈와 저는 제가 스무 살 되던 때에 아버지의 차고에서 애플을 시작했답니다. 우린 열심히 일했고 차고에서 둘이 하던 애플은 10년 내에 4000명의 직원이 일하는 20억달러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최대의 역작인 맥킨토시를 일년 전에 출시했고 저는 30대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전 해고 당했어요. 어떻게 제가 창업한 회사에서 제가 해고 당하죠? 애플이 성장하자 우린 저와 함께 회사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을 고용했어요. 그리고 처음 얼마간은 회사도 잘 됐지요. 그러나 곧 우리가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젼은 멀어져만 갔고 결국은 분쟁이 일어났어요.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이사회는 그의 편을 들었죠. 그래서 서른 살에 저는 쫓겨났어요. 아주 공개적으로 쫓겨났어요. 성인이 된 후 제가 집중하던 일은 사라져버렸고 전 참담했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몇 달 동안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제 느낌엔 제가 이전 세대의 기업가를 망하게 내버려 두는 것 같았어요.- 제게 넘겨준 바톤을 떨어트렸던 거죠. 전 데이빗 팩커드(HP 창업자)도 만나고 밥 노이스(인텔 창업자)도 만났고 사업을 망친 일을 사과하려 했어요. 전 아주 널리 알려진 실패자여서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려고까지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뭔가가 제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전 아직도 제가 한 일을 사랑하고 있었죠. 애플에서 일어난 사건이 절 조금도 바꾸지 못했어요. 전 거부당했지만 아직도 사랑했던 거죠.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그 당시엔 알지 못했지만 애플로부터 해고당한 것은 제게 일어난 최고의 일이었습니다. 성공을 하고 있다는 무거운 부담은 초심의 가벼움으로 바뀌었고 모든 것에 대해 덜 확신하게 되었죠. 이런 상황이 절 자유롭게 해 주어서 제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를 맞게 됩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후 오년동안 넥스트와 픽사를 창업하고 제 아내가 된 멋진 여자와 사랑하게 됩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한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스토리를 창조하게 되고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됐습니다. 더 기가막힌 결말은 애플이 넥스트를 샀고 전 애플로 복귀했고, 넥스트에서 우리가 개발한 기술은 애플의 최근 성공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전 멋진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확언하건데 만약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약의 맛은 지독했지만 제 생각엔 이 환자에게 필요한 약이었죠. 가끔 인생이 벽돌로 머리를 내리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념을 잃지는 마십시오. 확언하지만 제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은 제가 하고있는 일을 사랑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사랑하는 것을 찾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일도 그렇듯이 사랑하는 사람도 그럴 것입니다. 일은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요. 진정으로 만족하는 방법은 멋진 일이라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멋진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발견하지 못하셨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가슴으로 느껴지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 그것을 발견하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멋진 관계가 그러하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아질 겁니다. 그러니 찾을 때까지 계속 살펴보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제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겁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제가 열 일곱 살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읽었는데 '만약 매일같이 이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어느날엔 가는 네가 확실히 맞는 날이 있을 것이다.' 전 이 이야기가 인상 깊었고 그래서 그 후 삼십 삼 년간 매일아침 거울을 바라다보며 내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는 일을 할 것인가?' 그리고 며칠동안 그 답이 '아니다.'로 나오게 되면 제가 뭔가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제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기억은 제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 만나는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것을 - 모든 외부적인 기대, 자존심, 황망함이나 실패에 대한 공포 - 이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모두 사라져버리고 단지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만 남게 되기 때문이지요. 죽으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뭔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최선책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빨가벗었습니다. 당신의 가슴이 바라는 바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일년 전쯤 저는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아침 일곱시 삼십분에 스캔을 했는데 제 췌장에 종양이 있더군요. 전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가 제게 말하길 이 종류의 암은 거의 대부분 치료가 불가능하고 삼개월에서 육개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요. 제 의사가 제게 조언하길 집으로 돌아가서 일들을 정리하라고 하는 의사로서 해줄 수 있는 죽음을 준비하라는 이야기였어요. 즉 향후 십년 동안 애들에게 해줄 이야기를 몇 달 안에 다 하란 말이었죠. 모든 일들을 용의주도하게 해 놓아서 가족들을 가능한 한 편안하게 해주라는 거였죠. 즉 작별인사를 하라는 거였죠.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하루종일 그 진단과 살았습니다. 그날 저녁 생체검사를 했는데 내시경을 내 목으로 밀어 넣어서 위를 거쳐 소장까지 넣고 췌장에 바늘을 꼽아 종양에서 몇 개의 세포를 떼어냈습니다. 저는 차분했고, 같이 있던 제 아내가 이야기 하길 현미경으로 조직을 보던 의사가 제 종양은 아주 희귀한 형태의 췌장암으로 수술을 통해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곤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고요. 전 수술을 받았고 이젠 멀쩡합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것이 제가 죽음을 가장 근접해서 대면한 경우입니다. 그리고 향후 수 십 년간 이것이 가장 근접한 경험이 되길 바랍니다. 이런 인생 경험을 하면서 여러분께 조금 더 확신을 갖고 죽음을 말씀을 드릴 수 있는데 이는 죽음이 유용하지만 순수하게 지적인 개념이라는 것 이상일 겁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그 누구도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은 사람 조차도 거기 가기 위해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종착역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한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꼭 그래야 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삶이 만들어 낸 유일한 최고의 발명품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삶을 변화시키는 매개체입니다. 죽음은 낡은 것을 치우고 새로운 것들에게 길을 열어줍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새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멀지않은 미래에 여러분은 서서히 낡은 것이 되고 폐기될 겁니다. 너무 드라마틱해서 죄송합니다만 또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것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도그마에 빠지지 마십시오. 도그마에 빠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생각한 결과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잡음 같은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 자기 내부의 목소리가 매몰되지 않게 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 용기를 내서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십시오. 이것들은 당신들이 진정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이미 알고있습니다. 그 외의 것들이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젊은 시절에 '전 지구 카탈로그'란 멋진 출판물이 있었는데, 이건 우리 세대의 일종의 바이블이었죠. 이것은 만든 이는 스튜어트 브랜드이고 이 곳 멘로 팍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시적인 감각으로 이 잡지에 생명을 불어넣었답니다. 1960년대 후반이니 컴퓨터라든지 데스크탑 인쇄 같은 게 없던 시절이죠. 그래서 이 잡지는 타자기와 가위 그리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만들어졌어요. 이건 일종에 종이로 된 구글 같은 거였죠. 구글이 나타나기 35년 전에 말이죠. 이상적이었고 참신한 도구와 멋진 말들로 넘쳐 났었죠.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스튜어트와 그 팀은 여러 호의 전 지구 카탈로그를 냈는데 주어진 호를 다 내고 나서 마지막 호를 냈어요. 이때가 1970년대 중반이니 제가 여러분 나이 때죠. 마지막 호의 뒷면은 이른 아침 시골 길의 사진이었는데 여러분들이 모험을 좋아한다면 히치하이킹을 해봄 직한 그런 도로 였죠. 그 아래 이런 글귀가 있었어요. '배고프게 살아라. 바보 같이 살아라.' 이것이 그들이 사라져가며 남긴 이별의 메시지였습니다. 배고프게 살아라. 바보 같이 살아라. 그리고 저는 항상 제 자신이 그러길 바랐습니다.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새로 시작하려는 여러분께 축원하노니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프게 살아라. 바보 같이 살아라.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들 중 한 곳인 이 곳을 졸업하는 여러분과 오늘 함께 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이 번이 제게는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와 보는 것입니다. 오늘 전 여러분에게 제 인생의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 뿐 입니다. 대단한 게 아니죠. 단지 세 가지 이야기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첫번째 이야기는 점들이 연결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저는 리드 대학을 6개월 만에 그만뒀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대학을 그만 두기 전에 약 18개월 정도를 청강생으로 있었습니다. 제가 왜 대학을 그만두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이 모든 것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생모는 젊은, 결혼하지 않은 대학원생이었는데, 그녀는 저를 다른 가정에 입양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제가 대학을 졸업한 부모에게 입양되기를 매우 강력하게 희망했고, 그래서 제가 태어나면 한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죠. 하지만 제가 세상에 튀어나왔을 때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여자 아이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결정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대기자 명단에 있던 제 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전화로 '우리가 예상치 않았던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혹시 이 아이를 원하는가?'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 부모님은 '물론이죠!'라고 하셨다지요. 저의 생모는 나중에서야 제 어머니가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제 아버진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최종 입양 서류에 사인하길 거부하셨지요. 그녀는 제 부모님이 저를 나중에 대학에 보내겠노라고 약속한 몇 달 후에서야 비로소 마음을 누그러뜨리셨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그리고 17년 후 저는 정말 대학엘 갔습니다. 하지만 전 순진하게도 거의 스탠포드 대학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선택했고, 제 노동자계급의 부모님이 모은 저축 모두가 저의 학비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 전 대학에서 가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제가 그것을 펼쳐가는데 대학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저는 부모님들이 평생 일해서 모은 돈을 써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정했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믿기로 했지요. 그 당시 그것은 무척 겁나는 일이었지만 뒤 돌아 보면 그 결정은 제가 이제껏 제 인생에서 내린 결정들 중 가장 잘 한 것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대학을 그만두자 제가 흥미 없어 하던 필수 과목들을 들을 필요가 없어졌고 재미있어 보이는 과목들을 청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이 모든 것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전 기숙사 방도 없어서 친구들의방에 끼어 바닥에서 잤습니다. 그리고 콜라 병을 수집해서 병 당 5 센트씩 환불 받아 먹을 것을 마련했습니다. 일요일 저녁마다 마을을 가로질러 7마일(10킬로미터)을 걸어서 하리 크리슈나 사원에 가서 일주일에 한번 좋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전 이걸 정말 좋아했어요. 이렇게 제 호기심과 직관을 따름으로써 우연히 마주치게 된 많은 것들은 나중에 값을 매길 수 없을 큼 귀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리드 대학은 그 당시 아마도 미국에서 최고로 습자법을 잘 가르치는 곳이었습니다. 교내에 있는 모든 포스터나 모든 서랍의 색인은 아름답게 수작업으로 쓰여져 있었답니다. 전 대학을 그만 두었기 때문에 일반 과목들은 들을 필요가 없었지만 이 것을 어떻게 하는 건 지 배워보려고 습자법 수업을 듣기로 결정했지요. 저는 활자체에 장식선을 붙이는 방법, 서로 다른 글자들의 조합에서 간격을 조절하는 법, 그리고 무엇이 멋진 글자들을 정말로 멋지게 하는 지에 관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아주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으로 미묘해서 과학이 잡아낼 수 없는 방식의 것이었고 전 이게 아주 매혹적이란 것을 알게 되었지요.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이 중 그 어떤 것도 제 인생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리란 희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십 년 후 우리가 최초의 맥킨토시 컴퓨터를 디자인하고 있었을 때, 그 모든 것이 제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맥 속에다 그 모든 것을 디자인해 넣었지요. 그것은 멋진 활자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죠. 만약 제가 대학에서 그 과목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맥은 다양한 서체도 결코 갖지 못했을 것이고 균형 있게 이루어진 폰트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는 맥의 복사품이니 컴퓨터에서 이런 것들이 없었을 수도 있겠죠. 제가 대학을 중퇴하지 않았다면 전 습자법을 청강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컴퓨터에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멋진 글자체도 없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대학시절에 점들을 미래로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 전을 되돌아 보면 이건 매우 분명합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다시 말씀드리지만 점을 미래로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과거로 연결할 수 있을 뿐이죠. 그래서 여러분은 믿어야 합니다. 점들은 미래로 어떻게든 연결 된다는 것을 말이죠.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믿어야 합니다. 당신들의 심지, 운명, 인생, 전생 그 무엇이든지요. 이런 접근법을 이용해서 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었죠.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제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패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전 운이 좋았답니다.- 인생 초반기에 제가 사랑하는 일을 찾았으니까요. 워즈와 저는 제가 스무 살 되던 때에 아버지의 차고에서 애플을 시작했답니다. 우린 열심히 일했고 차고에서 둘이 하던 애플은 10년 내에 4000명의 직원이 일하는 20억달러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최대의 역작인 맥킨토시를 일년 전에 출시했고 저는 30대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전 해고 당했어요. 어떻게 제가 창업한 회사에서 제가 해고 당하죠? 애플이 성장하자 우린 저와 함께 회사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을 고용했어요. 그리고 처음 얼마간은 회사도 잘 됐지요. 그러나 곧 우리가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젼은 멀어져만 갔고 결국은 분쟁이 일어났어요.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이사회는 그의 편을 들었죠. 그래서 서른 살에 저는 쫓겨났어요. 아주 공개적으로 쫓겨났어요. 성인이 된 후 제가 집중하던 일은 사라져버렸고 전 참담했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몇 달 동안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제 느낌엔 제가 이전 세대의 기업가를 망하게 내버려 두는 것 같았어요.- 제게 넘겨준 바톤을 떨어트렸던 거죠. 전 데이빗 팩커드(HP 창업자)도 만나고 밥 노이스(인텔 창업자)도 만났고 사업을 망친 일을 사과하려 했어요. 전 아주 널리 알려진 실패자여서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려고까지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뭔가가 제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전 아직도 제가 한 일을 사랑하고 있었죠. 애플에서 일어난 사건이 절 조금도 바꾸지 못했어요. 전 거부당했지만 아직도 사랑했던 거죠.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그 당시엔 알지 못했지만 애플로부터 해고당한 것은 제게 일어난 최고의 일이었습니다. 성공을 하고 있다는 무거운 부담은 초심의 가벼움으로 바뀌었고 모든 것에 대해 덜 확신하게 되었죠. 이런 상황이 절 자유롭게 해 주어서 제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를 맞게 됩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후 오년동안 넥스트와 픽사를 창업하고 제 아내가 된 멋진 여자와 사랑하게 됩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한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스토리를 창조하게 되고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됐습니다. 더 기가막힌 결말은 애플이 넥스트를 샀고 전 애플로 복귀했고, 넥스트에서 우리가 개발한 기술은 애플의 최근 성공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전 멋진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확언하건데 만약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약의 맛은 지독했지만 제 생각엔 이 환자에게 필요한 약이었죠. 가끔 인생이 벽돌로 머리를 내리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념을 잃지는 마십시오. 확언하지만 제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은 제가 하고있는 일을 사랑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사랑하는 것을 찾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일도 그렇듯이 사랑하는 사람도 그럴 것입니다. 일은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요. 진정으로 만족하는 방법은 멋진 일이라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멋진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발견하지 못하셨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가슴으로 느껴지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 그것을 발견하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멋진 관계가 그러하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아질 겁니다. 그러니 찾을 때까지 계속 살펴보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제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겁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제가 열 일곱 살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읽었는데 '만약 매일같이 이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어느날엔 가는 네가 확실히 맞는 날이 있을 것이다.' 전 이 이야기가 인상 깊었고 그래서 그 후 삼십 삼 년간 매일아침 거울을 바라다보며 내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는 일을 할 것인가?' 그리고 며칠동안 그 답이 '아니다.'로 나오게 되면 제가 뭔가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제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기억은 제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 만나는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것을 - 모든 외부적인 기대, 자존심, 황망함이나 실패에 대한 공포 - 이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모두 사라져버리고 단지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만 남게 되기 때문이지요. 죽으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뭔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최선책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빨가벗었습니다. 당신의 가슴이 바라는 바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일년 전쯤 저는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아침 일곱시 삼십분에 스캔을 했는데 제 췌장에 종양이 있더군요. 전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가 제게 말하길 이 종류의 암은 거의 대부분 치료가 불가능하고 삼개월에서 육개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요. 제 의사가 제게 조언하길 집으로 돌아가서 일들을 정리하라고 하는 의사로서 해줄 수 있는 죽음을 준비하라는 이야기였어요. 즉 향후 십년 동안 애들에게 해줄 이야기를 몇 달 안에 다 하란 말이었죠. 모든 일들을 용의주도하게 해 놓아서 가족들을 가능한 한 편안하게 해주라는 거였죠. 즉 작별인사를 하라는 거였죠.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하루종일 그 진단과 살았습니다. 그날 저녁 생체검사를 했는데 내시경을 내 목으로 밀어 넣어서 위를 거쳐 소장까지 넣고 췌장에 바늘을 꼽아 종양에서 몇 개의 세포를 떼어냈습니다. 저는 차분했고, 같이 있던 제 아내가 이야기 하길 현미경으로 조직을 보던 의사가 제 종양은 아주 희귀한 형태의 췌장암으로 수술을 통해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곤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고요. 전 수술을 받았고 이젠 멀쩡합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것이 제가 죽음을 가장 근접해서 대면한 경우입니다. 그리고 향후 수 십 년간 이것이 가장 근접한 경험이 되길 바랍니다. 이런 인생 경험을 하면서 여러분께 조금 더 확신을 갖고 죽음을 말씀을 드릴 수 있는데 이는 죽음이 유용하지만 순수하게 지적인 개념이라는 것 이상일 겁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그 누구도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은 사람 조차도 거기 가기 위해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종착역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한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꼭 그래야 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삶이 만들어 낸 유일한 최고의 발명품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삶을 변화시키는 매개체입니다. 죽음은 낡은 것을 치우고 새로운 것들에게 길을 열어줍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새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멀지않은 미래에 여러분은 서서히 낡은 것이 되고 폐기될 겁니다. 너무 드라마틱해서 죄송합니다만 또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것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도그마에 빠지지 마십시오. 도그마에 빠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생각한 결과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잡음 같은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 자기 내부의 목소리가 매몰되지 않게 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 용기를 내서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십시오. 이것들은 당신들이 진정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이미 알고있습니다. 그 외의 것들이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젊은 시절에 '전 지구 카탈로그'란 멋진 출판물이 있었는데, 이건 우리 세대의 일종의 바이블이었죠. 이것은 만든 이는 스튜어트 브랜드이고 이 곳 멘로 팍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시적인 감각으로 이 잡지에 생명을 불어넣었답니다. 1960년대 후반이니 컴퓨터라든지 데스크탑 인쇄 같은 게 없던 시절이죠. 그래서 이 잡지는 타자기와 가위 그리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만들어졌어요. 이건 일종에 종이로 된 구글 같은 거였죠. 구글이 나타나기 35년 전에 말이죠. 이상적이었고 참신한 도구와 멋진 말들로 넘쳐 났었죠.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스튜어트와 그 팀은 여러 호의 전 지구 카탈로그를 냈는데 주어진 호를 다 내고 나서 마지막 호를 냈어요. 이때가 1970년대 중반이니 제가 여러분 나이 때죠. 마지막 호의 뒷면은 이른 아침 시골 길의 사진이었는데 여러분들이 모험을 좋아한다면 히치하이킹을 해봄 직한 그런 도로 였죠. 그 아래 이런 글귀가 있었어요. '배고프게 살아라. 바보 같이 살아라.' 이것이 그들이 사라져가며 남긴 이별의 메시지였습니다. 배고프게 살아라. 바보 같이 살아라. 그리고 저는 항상 제 자신이 그러길 바랐습니다.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새로 시작하려는 여러분께 축원하노니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프게 살아라. 바보 같이 살아라.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운은 잠자면서 기다려서 되는 게 아니다. 실력을 가졌을 때 운은 웃으며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위태로운 일을 일체 피한다.
- 大望 -
- 大望 -
10/05/2011
김성근 감독님 강연
김성근 감독님 강연
2011년 10월 4일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 대강당
안녕하십니까 김성근입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이 11번째 짤렸다고들 합니다. 저는 몰랐는데 주변사람들이 말해줘서 알았습니다. 그래도 있는 동안 후회 없이 전력투구하고 와서 미련은 남지 않는 것 같아요. 현장에 있을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싸웠어요. 그건 리더로서의 팀을 이끌어야한다는 사명감 때문인 것 같아요.
살아남기 위해 일하거나 일하기 위해 살아남는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일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 그런 사람들은 아주 불쌍한 것 같다. 일이라는 것은 자신의 신념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나중에 후회가 막심하다.
그래서 그 반대로 살아온 나는 SK에 큰 미련이 없다. 최선을 다하고 난 뒤의 일이라 큰 후회는 남지않는다. 다만 그렇게 힘겹게 싸워온 뒤의 휴식이라 목표가 없어져서 허무한 감이 없잔아 있다.
인간이란 불안정할 때, 구석에 몰렸을 때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나는 무슨 일이 있을 경우 주변 상황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론이나 구단이나 누가 떠들건 신경쓰지 않았다. 세상에 맞춰서 사는 건 아니라고 본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이 있으면 남과 타협하거나 기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오직 나만이 중요하다. 나는 변명이나 남 탓 하는 사람은 굉장히 싫어한다.
야구판에 핀치는 곧 찬스라는 말이 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다. 5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SK에 있으면서 어려울 때나 고민이 있을 때는 숙소에서 인천구장까지 두 시간이 넘는 기간을 자주 걸어갔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더 걸었다. 매번 걸을 때마다 생각하던 것은 김성근이 니가 문제다라는 것이다. 가끔 이호준이 이놈 왜 그렇게 못치지 하는 등의 생각도 했는데(좌중 웃음) 결국은 내가 잘 못해서 그런 것 이었다.
저번에 한번은 결심을 하고 머리를 박박 밀었는데, 어찌어찌 팀이 좀 안정이 되나 했는데 결국은 짤렸어요(좌중 웃음) 아마 머리 깎고 잘린 감독 나밖에 없지 않나 시포요
내가 태평양에 있을 때 오대산에 한번 간 일이 있어요. 지금 가라면 못갈 것 같은데, 그때는 팀의 구심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갔어요. 그때 5명씩 팀을 짜서 팀웍을 키우게하려고 팀을 짜서 굴렸어요. 눈밭에 굴렸어요 맨몸으로. 애들이 사과랑 땅콩같은 것들을 몇 개 가져가서 먹게했는데, 그때 사과는 못먹었다고 하더라고 얼어서. 나는 안 가봐서 몰라요.(웃음). 아무튼 다음날 보니까 살아서 왔더라고.
나는 프로 말고 학생들 가르칠 때도 그런 훈련을 많이 시켰어요. 극기훈련 같이 생과 사를 가로지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충암고도 태평양처럼 전국에서 온 학생들이 있던 팀이었는데 그 부임한 해에 우승했어요. 태평양도 62승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태평양에 있을 때 1승도 못했던 투수가 셋 있었는데, 엄청 훈련시켰고 다음해 그 세 명이 40승을 했어요. 그 훈련을 시킬때는 공을 던지게 하는데 포수 미트에 가져간 대로 공이 안들어오면 카운트를 안했어요. 그렇게 훈련을 시킨 뒤에 사람이 달라지더라고. 사람이란 극한의 상황에서 그것을 극복해야 바뀐다고 생각해요. 그때 그 투수들도 그렇게 고생한 뒤에 많은 발전이 있었어요.
쌍방울 갔을 때는 박성기라는 선발투수가 있었는데, 승률이 3할2푼이었어요. 이건 투수가 아니에요. 아마 내가 나가도 그것보단 잘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생긴 게 벌떼야구에요. 이젠 다른 사람들은 다 알더라고. 대만을 갔는데도 대만사람들이 나한테 벌떼야구가 뭐냐고 했는데 나도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때 그래서 한 경기에 투수를 다섯명이고 몇 명이고 내서 이겼어요. 그쯤에 김현욱이라는 투수가 20승을 했는데 그건 엄청난건데 야구 모르는 사람들이 MVP를 안줬어요.
난 쌍방울에서 감독으로 제일 많이 성장했다고 봐요. 이건 뭐가 있는게 있어야지. 그래서 없는 상황이라 더 많이 성장할 수 있었어요. 투수교체 타이밍. 이것도 투수가 워낙 없다보니 그 때 보는 눈이 생겼어요. 타자의 노림수라거나 교체타이밍이라는 걸 그때 좀 알겠더라구요.
그때 박경완이도 나한테 욕 많이 먹었어요. 요즘은 티비에 나와서 안돼요(웃음).
그리고 내가 LG에 갔을 때는 개인만 있고 팀이 없었어요. 양준혁이랑 이병규도 있었어요. 양준혁이도 한번은 대구 경기 끝나고 한번 엄청 욕먹었고, 이병규도 수비 때문에 엄청 욕먹었어요. 김재현이도 그랬고. 그래도 그 셋이 정말 착한 선수들이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SK는 심하게 말해서 인사하는 법도 몰랐어요. 그래서 그것부터 가르쳤고. 2003년에 SK가 준우승을 한번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구단에서 초청해서 부장이랑 감독들도 있는자리에서 말을 한번 해달라고 해서 간적이 있었어요. 나는 또 말하라고 하면 가려서 말하는게 없어요. 말을 계속 하다보니까 감독이랑 부장이 나가더라고. 한국시리즈에서 왜 졌냐고 하는 말을 하는데 그때는 SK는 준우승에 만족하더라고. 그러면 안되는건데.
조동화 박재상 김강민도 참 못하는 애들이었는데, 김강민도 어깨 하나 좋아서 외야수 시켰어요. 그래도 그 애들이 지금 팀의 주축이니까 육성이라는게 참 대단한거에요. 정근우만 해도 쪼그만해서 캐치볼도 잘 못하던 애였는데. 뭐 지금도 캐치볼은 못해요. 이진영이 그때 1루수였는데 정근우가 원바운드로 송구했는데 아차싶었는데 이진영이 잡았어요. 내가 덕아웃에서 잘 안일어나는데 그때는 뛰쳐나와서 웃었어요.
젊은 사람들은 한계를 높게 잡아야해요. 07년에 초반에는 젊은 선수들이 많이 딸렸는데 후반갈수록 올라왔어요. 박재상이도 많이컸고. 07년이 SK야구의 시작이 아닌가 싶어요
어떤 역경속에 처해도 굴복하지마라. 사람은 다 극복할 수 있다. 언젠가 한번은 캠프를 갔는데 혼자 밥을 먹고있었다. 옆테이블에 보니까 중년 부부가 와있더라. 근데 부인이 모자를 쓰고있었다. 근데 SK관계자냐고 물었는데 그렇다고 하니까 어제 자기 애가 SK선수한테 사인볼 받았다고 고맙다면서 얘기가 시작됐는데 그날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고 하더라. 암에 걸렸는데 그분이 원래 교단에 스셨던 분이었단다.
며칠 뒤에 캠프지를 떠나는 날 새벽에 4시에 일어나서 그분한테 편지를 썼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대로 살수 있다는 내용의 장문의 편지였다. 근데 가을에 가보니 그분이 다시 교단에 서 있더라. 사람은 절실하면 그런 결과가 오지 않나 싶더라. 그분이 교단에 선 뒤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 없더라.
내가 쌍방울 있을 때 오키나와 캠프에 갔는데, 역시 캠프를 온 LG를 보러갔다. 그때 엘지 1군은 사이판으로 갔고, 2군은 오키나와에 와있었다. 그때 관계자가 나에게 한명도 손실없이 1군에 올라갈 수 있겠다 라고 했다. 그때 나는 요시 LG는 잡았다라고 확신했다. 이 팀은 무슨생각을 가지고 야구를 하고 있냐고 생각했다. 안전빵으로 보통만 하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것은 근무태만이다. 그것이 LG였다.
부모의 생각 하나가 자식을 키우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나는 할아버지 스타일의 감독을 제일 싫어한다. 오냐오냐하는 것은 선수를 망친다. SK왔던 박진만이. 게을러요. 표정그대로다. 뒹굴뒹굴해요. 박진만을 망가뜨린 것은 현대 삼성시절의 지도자들이 아닌가 싶다. 선수가 더 발전할 수 있는데 그 한계를 정해버렸던 것 같다. 근데 또 올해 경기하는데 하필이면 삼성경기에요. 그날 한경기에 두 개나 실책해서 결국 역전패했어요. 그래서 그날 끝난 뒤에 열이 받아서 500개 펑고를 했는데 일부러 못잡을 코스로 좌우 폭 넓게 해서 쳤어요. 나중엔 네발로 기더라고. 근데 그 뒤로 박진만이가 좀 살아났어요.
또 한번은 원정경기에서 정근우가 번트를 실패했는데, 그날 코치한명 붙여서 바로 문학구장으로 보냈다. 번트를 천개를 시켰는데 한밤중이 돼서 리베라호텔로 돌아오더라. 근데 그 뒤로는 번트를 잘 대더라.
사람들은 쉽게 만족을 하고 산다. 나는 이겨도 무표정하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긴 경기라도 더 완벽하게 이길 수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항상 선수를 내 뒤에 숨겼다. 그래서 구단과 마찰이 심했다. 내가 편하게 구단과 손잡고 선수와 코치를 내 앞에 놔뒀으면 굉장히 편했을거다. 근데 나는 그렇게 하지않았다. 내 생각에 내 뒤에서 있던 선수들은 굉장히 편했지않나 싶다.
야구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아야한다. 머리로 알 수 있을 때까지가 아니라 몸이 따라갈 때 까지 해야 한다.
올해 초에 삼성병원에서 수술할 때 이승엽이가 병문안 왔을 때도 한시간반동안 뭐라고 한적이 있다. 요즘은 좀 나아졌는데, 사람은 변명이 있으면 안된다. 일단 벽이 있으면 부딪히고 봐야한다.
감독들의 코멘트를 보면 그 팀이 어떻게 되겠다 알아요. 시즌초에야 뭐 그렇다 쳐도, 시즌 중후반으로 갈수록 성적부진을 선수탓으로 돌리는 감독이 있는데 그 팀은 망한거에요.
SK할때는 내가 공공의 적이었어요. 내가 무슨 공산당도 아니고 말이지.
여기서 여러분에게 내가 말해드리고 싶은 것은 포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경기를 지고있더라도 포기를 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 반드시 역전의 기회가 온다.
LG에 있을 때 기아에 3점차 리드당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포기를 하지않고 있었다. 근데 그때 조인성이 실책해서 4점차로 벌어졌다. 3점차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역전할 수 있었는데 4점차는 3점차랑 다르다. 그래서 그때 조인성이 들어왔을 때 덕아웃 뒤로가서 복싱연습좀 했어요.(좌중웃음) 그놈이 원래 남 탓하는 버릇도 좀 있어요. 2군도 세 번정도 보냈는데 그리고 나니까 더 보낼데가 없어요, 무슨 감옥을 보낼수도 없고.(웃음) 아무튼 조인성이도 요즘보면 좀 나아졌어요.
야구에서도 확인사살이라는게 있는데 나는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전에도 7대영에서 8대7로 역전당하는 경기를 봤다. 나는 7회건 8회건 9회건 리드하고 있을 때도 투수교체를 한다. 얼마든지 역전이 될 수 있는 게 야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 신경쓰지않고 사는데도, 사람들이 매번 그러니까 나도 한번은 흔들린 적이 있었다. 5점 리드하고 있을 때 그래서 확인사살을 안하고 그대로 갔는데 그 경기가 뒤집어졌다. 그 경기가 끝난 뒤에 굉장히 자책을 많이 했다. 그렇게 한번 지는 건 한 경기 패배한 게 아니라 흐름이 바뀌는 거에요. 연승이 끊어질 수도 있고 연패가 길어질 수도 있는 거에요. 그래서 야구는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가야하는 거에요. 그래서 승부라고 하는 것은 이기고 있건 지고 있건 베스트로 가야해요.
우리집에 고양이가 네 마리있어요. 근데 키우는 고양이가 아니라 다 고양이에요. 그냥 사료주면 고양이들이 와서 먹고 또 자기도 하고 그래요. 이건 고양이 민박집이에요(웃음). 근데 요즘은 비둘기도 와서 사료를 노려요. 비둘기가 위에 앉아서 노리고 있으면 고양이는 또 그걸 못오게 경계해요. 그런걸 보면서 동물들도 절실하게 사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한테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은건, 요즘은 젊은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가늘고 길게 살려고하는 생각은 버려야한다고 생각해요. 안전빵으로 보통으로 하려고하면 상식적인 결과밖에 못 얻어요. 비정상적으로 비상식적으로 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예전에 캠프에서 SK선수들끼리 홍백전을 하는데 애들이 장난이 아닌거에요. 홈쇄도 할때도 와서 쾅 부딪히고. 팀끼리 하는 홍백전인데 그러는건 비정상적인거지. 지켜보는 나도 걱정을 했어요. 결국 그러다가 포수가 부상을 당했는데, 그때 부상당했어도 한국으로 안돌려 보냈어요. 그렇게 돌려보내면 다른 선수들이 그런 플레이를 안할거 같았거든. 아무튼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훈련해서 나온게 SK였어요.
나는 굵고 짧은 삶을 모토로 살았는데,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살면서 남 탓은 절대 하면 안돼요. 무언가 잘못되면 무조건 자신을 탓하세요. 그래야 길이 보이고 발전이 생겨요.
시간이 됐으니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은, 모든 일을 할 때에는 즐겁게 할 필요가 있지않나 싶어요. 즐겁지 않으면 즐겁게 만들어야 해요. 나는 야구장 가는 길이 제일 즐거워요. 여러분은 등교하는 길이 제일 즐거워야 해요. 그리고 나중에 회사를 가면 출근길이 제일 즐거워야해요.
그리고 일을 할 때 안된다 안된다 하는게 아니라, 안돼도 일단 하고 보는게 중요해요. 결과적으로 안되더라도 그 프로세스에서 얻는게 많아요. 나는 이제 60이지만 아직 젋다고 스스로 생각해요. 여러분 오늘 들어줘서 감사하고 열심히 사셨으면 해요
2011년 10월 4일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 대강당
안녕하십니까 김성근입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이 11번째 짤렸다고들 합니다. 저는 몰랐는데 주변사람들이 말해줘서 알았습니다. 그래도 있는 동안 후회 없이 전력투구하고 와서 미련은 남지 않는 것 같아요. 현장에 있을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싸웠어요. 그건 리더로서의 팀을 이끌어야한다는 사명감 때문인 것 같아요.
살아남기 위해 일하거나 일하기 위해 살아남는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일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 그런 사람들은 아주 불쌍한 것 같다. 일이라는 것은 자신의 신념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나중에 후회가 막심하다.
그래서 그 반대로 살아온 나는 SK에 큰 미련이 없다. 최선을 다하고 난 뒤의 일이라 큰 후회는 남지않는다. 다만 그렇게 힘겹게 싸워온 뒤의 휴식이라 목표가 없어져서 허무한 감이 없잔아 있다.
인간이란 불안정할 때, 구석에 몰렸을 때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나는 무슨 일이 있을 경우 주변 상황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론이나 구단이나 누가 떠들건 신경쓰지 않았다. 세상에 맞춰서 사는 건 아니라고 본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이 있으면 남과 타협하거나 기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오직 나만이 중요하다. 나는 변명이나 남 탓 하는 사람은 굉장히 싫어한다.
야구판에 핀치는 곧 찬스라는 말이 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다. 5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SK에 있으면서 어려울 때나 고민이 있을 때는 숙소에서 인천구장까지 두 시간이 넘는 기간을 자주 걸어갔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더 걸었다. 매번 걸을 때마다 생각하던 것은 김성근이 니가 문제다라는 것이다. 가끔 이호준이 이놈 왜 그렇게 못치지 하는 등의 생각도 했는데(좌중 웃음) 결국은 내가 잘 못해서 그런 것 이었다.
저번에 한번은 결심을 하고 머리를 박박 밀었는데, 어찌어찌 팀이 좀 안정이 되나 했는데 결국은 짤렸어요(좌중 웃음) 아마 머리 깎고 잘린 감독 나밖에 없지 않나 시포요
내가 태평양에 있을 때 오대산에 한번 간 일이 있어요. 지금 가라면 못갈 것 같은데, 그때는 팀의 구심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갔어요. 그때 5명씩 팀을 짜서 팀웍을 키우게하려고 팀을 짜서 굴렸어요. 눈밭에 굴렸어요 맨몸으로. 애들이 사과랑 땅콩같은 것들을 몇 개 가져가서 먹게했는데, 그때 사과는 못먹었다고 하더라고 얼어서. 나는 안 가봐서 몰라요.(웃음). 아무튼 다음날 보니까 살아서 왔더라고.
나는 프로 말고 학생들 가르칠 때도 그런 훈련을 많이 시켰어요. 극기훈련 같이 생과 사를 가로지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충암고도 태평양처럼 전국에서 온 학생들이 있던 팀이었는데 그 부임한 해에 우승했어요. 태평양도 62승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태평양에 있을 때 1승도 못했던 투수가 셋 있었는데, 엄청 훈련시켰고 다음해 그 세 명이 40승을 했어요. 그 훈련을 시킬때는 공을 던지게 하는데 포수 미트에 가져간 대로 공이 안들어오면 카운트를 안했어요. 그렇게 훈련을 시킨 뒤에 사람이 달라지더라고. 사람이란 극한의 상황에서 그것을 극복해야 바뀐다고 생각해요. 그때 그 투수들도 그렇게 고생한 뒤에 많은 발전이 있었어요.
쌍방울 갔을 때는 박성기라는 선발투수가 있었는데, 승률이 3할2푼이었어요. 이건 투수가 아니에요. 아마 내가 나가도 그것보단 잘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생긴 게 벌떼야구에요. 이젠 다른 사람들은 다 알더라고. 대만을 갔는데도 대만사람들이 나한테 벌떼야구가 뭐냐고 했는데 나도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때 그래서 한 경기에 투수를 다섯명이고 몇 명이고 내서 이겼어요. 그쯤에 김현욱이라는 투수가 20승을 했는데 그건 엄청난건데 야구 모르는 사람들이 MVP를 안줬어요.
난 쌍방울에서 감독으로 제일 많이 성장했다고 봐요. 이건 뭐가 있는게 있어야지. 그래서 없는 상황이라 더 많이 성장할 수 있었어요. 투수교체 타이밍. 이것도 투수가 워낙 없다보니 그 때 보는 눈이 생겼어요. 타자의 노림수라거나 교체타이밍이라는 걸 그때 좀 알겠더라구요.
그때 박경완이도 나한테 욕 많이 먹었어요. 요즘은 티비에 나와서 안돼요(웃음).
그리고 내가 LG에 갔을 때는 개인만 있고 팀이 없었어요. 양준혁이랑 이병규도 있었어요. 양준혁이도 한번은 대구 경기 끝나고 한번 엄청 욕먹었고, 이병규도 수비 때문에 엄청 욕먹었어요. 김재현이도 그랬고. 그래도 그 셋이 정말 착한 선수들이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SK는 심하게 말해서 인사하는 법도 몰랐어요. 그래서 그것부터 가르쳤고. 2003년에 SK가 준우승을 한번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구단에서 초청해서 부장이랑 감독들도 있는자리에서 말을 한번 해달라고 해서 간적이 있었어요. 나는 또 말하라고 하면 가려서 말하는게 없어요. 말을 계속 하다보니까 감독이랑 부장이 나가더라고. 한국시리즈에서 왜 졌냐고 하는 말을 하는데 그때는 SK는 준우승에 만족하더라고. 그러면 안되는건데.
조동화 박재상 김강민도 참 못하는 애들이었는데, 김강민도 어깨 하나 좋아서 외야수 시켰어요. 그래도 그 애들이 지금 팀의 주축이니까 육성이라는게 참 대단한거에요. 정근우만 해도 쪼그만해서 캐치볼도 잘 못하던 애였는데. 뭐 지금도 캐치볼은 못해요. 이진영이 그때 1루수였는데 정근우가 원바운드로 송구했는데 아차싶었는데 이진영이 잡았어요. 내가 덕아웃에서 잘 안일어나는데 그때는 뛰쳐나와서 웃었어요.
젊은 사람들은 한계를 높게 잡아야해요. 07년에 초반에는 젊은 선수들이 많이 딸렸는데 후반갈수록 올라왔어요. 박재상이도 많이컸고. 07년이 SK야구의 시작이 아닌가 싶어요
어떤 역경속에 처해도 굴복하지마라. 사람은 다 극복할 수 있다. 언젠가 한번은 캠프를 갔는데 혼자 밥을 먹고있었다. 옆테이블에 보니까 중년 부부가 와있더라. 근데 부인이 모자를 쓰고있었다. 근데 SK관계자냐고 물었는데 그렇다고 하니까 어제 자기 애가 SK선수한테 사인볼 받았다고 고맙다면서 얘기가 시작됐는데 그날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고 하더라. 암에 걸렸는데 그분이 원래 교단에 스셨던 분이었단다.
며칠 뒤에 캠프지를 떠나는 날 새벽에 4시에 일어나서 그분한테 편지를 썼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대로 살수 있다는 내용의 장문의 편지였다. 근데 가을에 가보니 그분이 다시 교단에 서 있더라. 사람은 절실하면 그런 결과가 오지 않나 싶더라. 그분이 교단에 선 뒤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 없더라.
내가 쌍방울 있을 때 오키나와 캠프에 갔는데, 역시 캠프를 온 LG를 보러갔다. 그때 엘지 1군은 사이판으로 갔고, 2군은 오키나와에 와있었다. 그때 관계자가 나에게 한명도 손실없이 1군에 올라갈 수 있겠다 라고 했다. 그때 나는 요시 LG는 잡았다라고 확신했다. 이 팀은 무슨생각을 가지고 야구를 하고 있냐고 생각했다. 안전빵으로 보통만 하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것은 근무태만이다. 그것이 LG였다.
부모의 생각 하나가 자식을 키우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나는 할아버지 스타일의 감독을 제일 싫어한다. 오냐오냐하는 것은 선수를 망친다. SK왔던 박진만이. 게을러요. 표정그대로다. 뒹굴뒹굴해요. 박진만을 망가뜨린 것은 현대 삼성시절의 지도자들이 아닌가 싶다. 선수가 더 발전할 수 있는데 그 한계를 정해버렸던 것 같다. 근데 또 올해 경기하는데 하필이면 삼성경기에요. 그날 한경기에 두 개나 실책해서 결국 역전패했어요. 그래서 그날 끝난 뒤에 열이 받아서 500개 펑고를 했는데 일부러 못잡을 코스로 좌우 폭 넓게 해서 쳤어요. 나중엔 네발로 기더라고. 근데 그 뒤로 박진만이가 좀 살아났어요.
또 한번은 원정경기에서 정근우가 번트를 실패했는데, 그날 코치한명 붙여서 바로 문학구장으로 보냈다. 번트를 천개를 시켰는데 한밤중이 돼서 리베라호텔로 돌아오더라. 근데 그 뒤로는 번트를 잘 대더라.
사람들은 쉽게 만족을 하고 산다. 나는 이겨도 무표정하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긴 경기라도 더 완벽하게 이길 수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항상 선수를 내 뒤에 숨겼다. 그래서 구단과 마찰이 심했다. 내가 편하게 구단과 손잡고 선수와 코치를 내 앞에 놔뒀으면 굉장히 편했을거다. 근데 나는 그렇게 하지않았다. 내 생각에 내 뒤에서 있던 선수들은 굉장히 편했지않나 싶다.
야구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아야한다. 머리로 알 수 있을 때까지가 아니라 몸이 따라갈 때 까지 해야 한다.
올해 초에 삼성병원에서 수술할 때 이승엽이가 병문안 왔을 때도 한시간반동안 뭐라고 한적이 있다. 요즘은 좀 나아졌는데, 사람은 변명이 있으면 안된다. 일단 벽이 있으면 부딪히고 봐야한다.
감독들의 코멘트를 보면 그 팀이 어떻게 되겠다 알아요. 시즌초에야 뭐 그렇다 쳐도, 시즌 중후반으로 갈수록 성적부진을 선수탓으로 돌리는 감독이 있는데 그 팀은 망한거에요.
SK할때는 내가 공공의 적이었어요. 내가 무슨 공산당도 아니고 말이지.
여기서 여러분에게 내가 말해드리고 싶은 것은 포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경기를 지고있더라도 포기를 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 반드시 역전의 기회가 온다.
LG에 있을 때 기아에 3점차 리드당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포기를 하지않고 있었다. 근데 그때 조인성이 실책해서 4점차로 벌어졌다. 3점차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역전할 수 있었는데 4점차는 3점차랑 다르다. 그래서 그때 조인성이 들어왔을 때 덕아웃 뒤로가서 복싱연습좀 했어요.(좌중웃음) 그놈이 원래 남 탓하는 버릇도 좀 있어요. 2군도 세 번정도 보냈는데 그리고 나니까 더 보낼데가 없어요, 무슨 감옥을 보낼수도 없고.(웃음) 아무튼 조인성이도 요즘보면 좀 나아졌어요.
야구에서도 확인사살이라는게 있는데 나는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전에도 7대영에서 8대7로 역전당하는 경기를 봤다. 나는 7회건 8회건 9회건 리드하고 있을 때도 투수교체를 한다. 얼마든지 역전이 될 수 있는 게 야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 신경쓰지않고 사는데도, 사람들이 매번 그러니까 나도 한번은 흔들린 적이 있었다. 5점 리드하고 있을 때 그래서 확인사살을 안하고 그대로 갔는데 그 경기가 뒤집어졌다. 그 경기가 끝난 뒤에 굉장히 자책을 많이 했다. 그렇게 한번 지는 건 한 경기 패배한 게 아니라 흐름이 바뀌는 거에요. 연승이 끊어질 수도 있고 연패가 길어질 수도 있는 거에요. 그래서 야구는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가야하는 거에요. 그래서 승부라고 하는 것은 이기고 있건 지고 있건 베스트로 가야해요.
우리집에 고양이가 네 마리있어요. 근데 키우는 고양이가 아니라 다 고양이에요. 그냥 사료주면 고양이들이 와서 먹고 또 자기도 하고 그래요. 이건 고양이 민박집이에요(웃음). 근데 요즘은 비둘기도 와서 사료를 노려요. 비둘기가 위에 앉아서 노리고 있으면 고양이는 또 그걸 못오게 경계해요. 그런걸 보면서 동물들도 절실하게 사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한테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은건, 요즘은 젊은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가늘고 길게 살려고하는 생각은 버려야한다고 생각해요. 안전빵으로 보통으로 하려고하면 상식적인 결과밖에 못 얻어요. 비정상적으로 비상식적으로 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예전에 캠프에서 SK선수들끼리 홍백전을 하는데 애들이 장난이 아닌거에요. 홈쇄도 할때도 와서 쾅 부딪히고. 팀끼리 하는 홍백전인데 그러는건 비정상적인거지. 지켜보는 나도 걱정을 했어요. 결국 그러다가 포수가 부상을 당했는데, 그때 부상당했어도 한국으로 안돌려 보냈어요. 그렇게 돌려보내면 다른 선수들이 그런 플레이를 안할거 같았거든. 아무튼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훈련해서 나온게 SK였어요.
나는 굵고 짧은 삶을 모토로 살았는데,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살면서 남 탓은 절대 하면 안돼요. 무언가 잘못되면 무조건 자신을 탓하세요. 그래야 길이 보이고 발전이 생겨요.
시간이 됐으니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은, 모든 일을 할 때에는 즐겁게 할 필요가 있지않나 싶어요. 즐겁지 않으면 즐겁게 만들어야 해요. 나는 야구장 가는 길이 제일 즐거워요. 여러분은 등교하는 길이 제일 즐거워야 해요. 그리고 나중에 회사를 가면 출근길이 제일 즐거워야해요.
그리고 일을 할 때 안된다 안된다 하는게 아니라, 안돼도 일단 하고 보는게 중요해요. 결과적으로 안되더라도 그 프로세스에서 얻는게 많아요. 나는 이제 60이지만 아직 젋다고 스스로 생각해요. 여러분 오늘 들어줘서 감사하고 열심히 사셨으면 해요
필리핀, 전력 시장 동향과 주요 발전 프로젝트
http://www.ois.go.kr/
필리핀, 전력 시장 동향과 주요 발전 프로젝트
- 전력분야 투자 지속, 직간접 사업기회 주목해야 -
2011-10-05
마닐라무역관
임성주 (sungju@kotra.or.kr )
□ Installed Capacity 기준, Grid 발전소 총발전용량 (total grid capacity)은 13,694MW,
- 발전 연료원별로는 아래표와 같이 석탄이 37%, 천연가스 23%, 수력 17%, 지열 13%, 오일 10% 순
- 이중 88%인 11,605 MW 발전용량은 PIPPA 회원사가 소유한 아래 29개 발전소가 보유
필리핀, 전력 시장 동향과 주요 발전 프로젝트
- 전력분야 투자 지속, 직간접 사업기회 주목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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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stalled Capacity 기준, Grid 발전소 총발전용량 (total grid capacity)은 13,694MW,
- 발전 연료원별로는 아래표와 같이 석탄이 37%, 천연가스 23%, 수력 17%, 지열 13%, 오일 10% 순
- 이중 88%인 11,605 MW 발전용량은 PIPPA 회원사가 소유한 아래 29개 발전소가 보유
필리핀내 발전소 현황 자료: PIPPA(필리핀 Independent Power Producers Association) |
좋은 선물
좋은 선물
좋은 뜻으로 선물을 할 때도
행복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선물이라고 해서
물질적인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거나, 그 사람에게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행복과 기쁨이 느껴진다.
'당신의 의지가 곧 나의 의지'라고 생각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려는 마음가짐이 있으면
안정.조화.기쁨.사랑 등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 엘프리다 뮐러-카인츠, 크리스티네 죄닝의 《내가 원하는 삶으로 이끄는 직관의 힘》중에서 -
선물은 주고 받는 것입니다. 물건도 주고 받지만 그보다 마음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사랑과 우정, 행복과 기쁨이 담겨 있는 선물, 때로는 따뜻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더없이 좋은 선물이 됩니다
좋은 뜻으로 선물을 할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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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인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거나, 그 사람에게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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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의지가 곧 나의 의지'라고 생각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려는 마음가짐이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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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프리다 뮐러-카인츠, 크리스티네 죄닝의 《내가 원하는 삶으로 이끄는 직관의 힘》중에서 -
선물은 주고 받는 것입니다. 물건도 주고 받지만 그보다 마음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사랑과 우정, 행복과 기쁨이 담겨 있는 선물, 때로는 따뜻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더없이 좋은 선물이 됩니다
It is my intention to present - through the medium of photography - intuitive observations of the natural world which may have meaning to the spectators.
- Ansel Adams (1902-1984)
내가 의도하는 것은 관객에게 의미가 있을 것 같은 자연에 대한 직관적인 관찰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 앤셀 애덤스 (미국 풍경사진작가, 1902-1984)
- Ansel Adams (1902-1984)
내가 의도하는 것은 관객에게 의미가 있을 것 같은 자연에 대한 직관적인 관찰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 앤셀 애덤스 (미국 풍경사진작가, 1902-1984)
10/04/2011
매력적인 사람
매력적인 사람
인생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늘 넓고 길게 바라보면서 생각을 높여가는 사람
실패할 때도 있지만,
실패의 이유를 알기 때문에 새로운 희망을 품는 사람
간혹은 게을러지지만,
일할 때는 불꽃같은 열정으로 창조의 꽃을 피우는 사람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한 사람에게 깊이 안길 수 있는 사람
가끔은 흔들리지만,
일단 결심하면 자신이 갈 길을 주저 없이 가는 사람
- 정용철의 《희망편지》중에서 -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누구든 흔들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매력을 얻는 절호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진짜 매력은 성공했을 때보다 실패했을 때, 넘치고 꼿꼿할 때보다 모자라고 흔들릴 때, 더 잘 드러납니다.
인생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늘 넓고 길게 바라보면서 생각을 높여가는 사람
실패할 때도 있지만,
실패의 이유를 알기 때문에 새로운 희망을 품는 사람
간혹은 게을러지지만,
일할 때는 불꽃같은 열정으로 창조의 꽃을 피우는 사람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한 사람에게 깊이 안길 수 있는 사람
가끔은 흔들리지만,
일단 결심하면 자신이 갈 길을 주저 없이 가는 사람
- 정용철의 《희망편지》중에서 -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누구든 흔들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매력을 얻는 절호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진짜 매력은 성공했을 때보다 실패했을 때, 넘치고 꼿꼿할 때보다 모자라고 흔들릴 때, 더 잘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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