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2005

[시론] 한국은행과 ‘파다 만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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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국은행과 ‘파다 만 우물’
경향신문 2005.04.25 (월)

김민수 서울대 미대 교수·객원 논설위원

고사에 ‘공휴일궤’(功虧一簣)란 말이 있다. ‘서경’에 나오는 이 말은 비유컨대, 아홉 길 우물을 파들어 가다가 한 삼태기의 흙만 더 파내면 물이 샘솟는데 거기까지 계속하지 못하고 그만 나자빠지는 것을 뜻한다. 이로 인해 이제껏 했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다는 말이다. 요즘 한국은행의 행보를 보면, 이 옛말이 생각난다.

-친일파가 그린 화폐인물화-

얼마전 한국은행이 화폐디자인 교체계획을 발표했다. 원화의 지폐 크기를 작게 하고, 색상도 식별력을 높여 화려하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지폐의 인물그림은 현행대로 유지하는 입장을 고수하기로 거듭 밝히고 있다. 이유인 즉, “각 이익집단의 요구가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어 소모적 논란에 휩싸일 경우 새 은행권 도입 일정에 차질이 우려 된다”는 것이다. 행정 편의상 속전속결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관료주의적 발상과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물화 교체에 대한 논의는 ‘소모적 논란’이 아닐 성싶다. 화폐는 생활의 기본일 뿐만 아니라, 일상 삶에 가장 밀접한 시각문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와 문화를 비추는 나라의 거울에 해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은의 이번 새 화폐발행 계획은 문제가 있다. 현행 세 종류의 지폐에는 세종대왕(1만원권), 율곡 이이(5,000원권), 퇴계 이황(1,000원권)이 각각 그려져 있다. 알려졌듯이, 영정 그림은 김기창(1만원권), 이종상(5,000원권), 이유태(1,000원권)가 각각 그렸고, 이외에도 100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 영정은 장우성이 그렸다. 이들 중 운보 김기창과 월전 장우성은 함께 대표적 친일화가로 확인된 바 있다.

엄밀히 말해, 화폐 속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두 친일화가가 상상한 그림일 뿐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한은측은 문화관광부가 표준영정을 새로 채택하지 않는 한 교체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편다. 지난 1973년 정부는 사진이 없는 역사인물이 마구 그려지는 혼란을 막기 위한 표준영정제를 도입해 영정 심의 및 선정을 해왔다. 그러나 표준영정의 기준이 절대불변이 아닐진대 문제점이 확인된 이상 바꾸면 될 일이다. 표준영정이 단순히 손재주나 기회주의적 유명세를 기준으로 선정되어 친일 붓으로 정신을 말살할 순 없다.

또한 문제가 된 화폐 속 인물 그림들은 실제로 보고 그려진 사실적 영정이 없어서 화가의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화가의 역사의식과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기본인데, 이를 친일화가에게 맡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김구, 유관순, 안중근 등의 신뢰할 만한 사진이 있고 존경받는 역사인물들은 왜 화폐로 디자인될 수 없는가? 중국 위안화의 경우 마오쩌둥과 소수민족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엔화의 경우는 게이오대 설립자인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 근대사에 한몫했던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 모두는 ‘사진에 기초한 초상화’를 사용한 특징을 갖는다. 이처럼 사실적으로 재현이 불가능해 상상으로 그려놓은 인물화를 단지 표준영정이라는 이유로 고수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유로화의 경우엔 심지어 유럽의 ‘건축문화유산’을 화폐도안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교체요구 묵살 관료주의 전형-

이런 이유로 한은이 엄청난 재원을 들여 화폐를 바꾸면서 기존의 인물화를 고수하겠다고 고집하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한은이 화폐의 역사문화적 상징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려는 의지만 있다면 여러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이렇듯 늘 우물을 파면서 한 삼태기의 흙을 더 파내지 못해 샘을 끝내 보지 못했던 ‘공휴일궤의 역사’였다. 이런 팔자 때문에 광복 60주년을 맞아,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고 교과서를 왜곡하는 등 제국주의 야욕을 드러내도, 과거사 청산문제를 두고 집안에서 논쟁만 벌이고 있다. 한국은행은 이번 화폐 디자인에서 물이 샘솟는 우물을 팔 순 없는가.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 파기가 갖는 중요성을 깨닫고 안일한 관료주의 관행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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