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2001

[역사에세이 유라시아천년] 29 장성과 明의 쇄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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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천년] 29 장성과 明의 쇄국주의
한국일보 | 기사입력 2001-06-19 17:02 | 최종수정 2001-06-19 17:02

베이징 서북 빠다링(八達嶺)의 (만리)장성에 가면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는 마오저뚱이 쓴 비석이 서있다.

외국 귀빈들이 중국을 방문하면 으레 안내하는 곳도 장성이다. 세계 7대 기적의 하나이며,달에서 볼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인공구조물이라는 이 장성이 중국인에게 그토록 자부심을 일으키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란 말인가.

B.C.7~6세기 춘추시대 진(秦) 조(趙) 연(燕) 등 각국이 상호 방어와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이 성을 쌓기 시작한 이래 17세기 명(明) 말에 이르기까지 장성은 2,000년이란 긴 축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장성이 중국인에게 진정한 자부심의 표상인지는 몰라도 이것을 빼고서 중국 역사와 문명을 논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공교롭게도 15인치 강수선을 따라 이어져 있는 장성은 농업과 유목의 천연적분계선인 동시에, 농경 한족이 북방유목민족의 침략을 막는 방어선이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평원과 초원의직접적인 대치는특이한 역사적 관계를 형성하였던 것이니,중국 전근대사는 한마디로 유목민족과 농경민족 간의 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물산이 풍부한 농경 한인들은 내향적이면서 안정을 추구하는 문화유형을 형성시켰다면 물산이 원초적으로 부족한 북방 유목민은 그 부족 부분을 중원에서 채워야만 했다. 이런 남북관계가 한인왕조로 하여금 장성을 축조하도록 하였다.

장성이라면 한(漢)족 통치자의 전유물로 오해하고 있지만,많은 유목민 출신 군주들도 중원에정권을 건립한 이후에 몽골고원에 등장한 새로운 주인들로부터 안전과 물자를 보호하기 위해 역시 장성을 쌓았다.

북위 동위 북제 수 금 등의 왕조가 그러했다. 중국 역대왕조는 위험이 덜한 바다에 신경을 쓰기보다 육지로쳐들어오는 유목민족의 방어가 더 시급한 것으로 항상 여겼다.

청나라 말기에마저 ‘육방(陸防)’론이 ‘해방(海防)’론을 제압할 정도였다. 이 점이 바로 북방민족이 중국의 역사에 남긴 깊은 주름살이다.

장성수축(修築)의 역사 가운데 가장 공력을 들인 시대는 뭐니 해도 진시황과 명대(1368-1644)이다.

진시황의 장성수축이 어느 정도 중국의 힘을 표현한 것이라면 명대 장성의 중수는 중국문명의 실패와 퇴영의 상징이다.

장성의 중수는 명대 대부분의 시간동안 거의 중단없이 계속되었으니 장성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과 많은 인력이 소요된 것이다.

벽돌과 돌로 만든 이 긴 성은 압록강변에서 가욕관(嘉谷關)까지 동서로 6,300여㎞나 된다. 성장(城牆)의 평균 고도 7~8m,평균 너비 4.5m이다. 장성위로 5마리의 말이 함께 달리고, 10인이 같이 걸을 수 있는 폭이다.

명이 이렇게 장성을 중수한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몽고초원으로 돌아가 대원(大元)제국의 부흥을 꿈꾸는 원의 잔존세력과 쇄국주의를 표방한 국시(國是),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명태조는 황자를 각지에 왕으로 봉하고 병권을 주었지만,장성 내외에 배치된 소위 ‘새왕(塞王)’들에게 훨씬 많은 병력을 배당했다.

또 인민의 희생을 감수하고 전매품인 소금의 판매권(鹽窩)을 염상에게 넘겨준 대신 그들로 하여금 북변 병사들의 군량조달을 책임지게 하는 정책을 취한 것도 장성 밖 북방의적이 그만큼 위협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성은 명조의 안전을 확보해 주지는 못하였다. 영종(英宗) 정통제(正統帝)가 토목보(土木堡)에서 원의 잔존세력의 하나인 오이랏트(瓦刺) 에센(也先)에게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던 것은 이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명은 계속 장성을 더욱 수리하고 쌓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찾지 못했다.

중국 역사상 명대는 ‘축성(築城)의 시대’라할 수 있다. 장성뿐만 아니라 시안(西安)이나 진조우(荊州)성 등 현재도 그 위용을 유감없이 자랑하고있는 성들 대부분이 명대에 축조되었다.

성에 대해 본래 호감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축성과 보성(補城)작업을 금지했던 원조를 이어 명조가 건국되었다는 점도 물론 작용되었다.

그러나 그 축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명조의 국시와 관계된것이었다.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지에 축조된 성들은 황제의위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명왕조가 국시로서 표방한 쇄국주의는 북방만이 아니라 해변에도 장성을 쌓게 했다. 장성은 소위 ‘북쪽 오랑캐와 남쪽 왜구(北虜南倭)’의 방어벽이었다.

1569년 계진총병( 鎭總兵)으로 부임하여 16년간에 걸쳐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쥐용관(居庸關)까지의 장성 축조를 지휘했던 척계광(戚繼光)은 왜구를 막기 위해 다시 해변에 장성을 수축했다.

그것이 바로 봉래수성(蓬萊水城)이다. 그가 이끄는 중국의 최초의 해군은 멀리 바다로 나가 적을 치기는 커녕 어처구니없게도 이 성벽 뒤에서 수비하고 있었다.

왜구가 끊임없이 바다를 건너와 중국을 치는 데도 중국은 그들이 무엇 때문에 쳐들어 오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려하지 않았다.

당시 유럽 각국은 이미 화기로 무장한 해군을 보유하고서 통상을 위해 세계 각처로 함대를 보내고 있었는데 중국은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해 장성을 보수하는데 정신이 없었고, 그 장성을 바다에까지 연장시켰던 것이다.

장성은 칼과 창, 활 등 소위 냉병기(冷兵器)를 사용하는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효용성은 줄어들었고, 결국 명나라 내외의 어느 적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였다.

장성축조는 많은 인력과 물력 소비한 결과 농민반란의 빌미를 제공하였을뿐, 정작 청의 대병 앞에는 크게 소용되지 않았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나라를 지키는 방도는 오직 덕을 닦아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에 있는 것(守國之道惟在修德安民)”이라면서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아 사람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衆志成城)”고 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은 장성을 수축하고 청은 묘우를 지었다(明修長城 淸修廟)’고 하듯이 청의 정책은 바뀌었다.

명의 실패를 거울삼아 청은 변방의 몽고 위구르 티벳 등여러 소수민족을회유·포용하기 위해 베이징에 라마 옹화궁(雍和宮)을, 행궁(行宮)인 열하(熱河)의 피서산장 밖에 각 민족 고유의 묘우(外八廟)를 지워주고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보장했다.

명과 다른 청의 이러한 대외인식의 변화도 소수민족의 종교적인 포용정책에 그쳤을 뿐, 그 시야를 보다 멀리 해외로 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이 청조가 갖는 한계였던 것이다.

장성은 56개 민족의 합체인 ‘중화민족’과 노동인민의 정권임을 표방하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수많은 중국 역사 유물 가운데 장성만큼 현재 중국의 국시와 맞지 않는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중화와 오랑캐를 가르고’ ‘노동인민의 수많은 희생을 강요’하면서 축조되었던 이 장성이 왜 그토록 자랑거리가 되는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박한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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